전혀 움직이려 하지 않던 미국이 자동차세 대폭 인하라는 대형카드가
나오고 나서야 움직이는 형국이었다.
내국세체계, 즉 조세주권을 포기하는 결과까지 빚어냈다.
내줄 것은 다 내준 굴욕적 양보였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대표단은 이번 협상을 시작하면서 슈퍼301조에 의한 우선협상대상국
관행(PFCP)지정만은 피해야 한다는 협상목표를 세웠다.
우선협상대상국관행으로 지정될 경우 미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
한국은 더 불리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협상이 결렬돼 무역분쟁으로 비화될 경우 한국정부가 지게될 정치적 부담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대표단을 괴롭혔다.
미국은 한국의 이같은 약점을 간파, PECP 지정일을 하루 연장시키며
벼랑끝까지 한국을 몰아붙였다.
협상대표단은 대형차의 자동차세를 대폭 내리기는 했지만 누진구조의
명맥만은 유지했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자동차세 인하폭이 컸던 만큼 누진구조유지는 명목상의 협상성과일
뿐 실질적으로는 단일세율을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가 많다.
구체적으로 2천5백cc 초과-3천cc 차량의 자동차세를 cc당 4백10원에서
3백10원으로, 3천cc 초과차량은 6백30원에서 3백70원으로 낮춘 것은 당초
정부가 쥐고 있던 대안보다 훨씬 큰 폭이다.
배기량에 따른 자동차세의 차등과세는 미국차에만 적용하는 불평등 과세도
아니다.
배기량이 큰 차가 초래하는 교통혼잡 에너지과다소비등을 고려, 국적구분
없이 물리는 무차별적 과세다.
일본도 자동차세를 배기량에 따라 차등부과하고 있으며 미국은 값비싼 차
(3만2천달러초과 차량)에 사치세를 물리고 있다.
이때문에 자동차세의 대폭 양보는 국정감사에서나 관련 세법을 개정할때
적잖은 논란을 불러 일으킬 전망이다.
자동차의 보유세가 너무 무겁다는 소비자들의 불만을 외면한 정부가 미국의
요구앞에 무력했다는 비판도 있다.
일부에서는 정부가 이번에 서둘러 양보하기보다는 WTO라는 정당한 국제
규범의 틀속에서 유연하게 임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통상부처에 대한 통상능력 부족이라는 지적도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박재윤통산부장관은 지난 2월 미국을 방문, 미키캔터 USTR대표등과 회담을
마친후 "한미간에 첨예한 통상문제는 없다"고 장담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이번 양보로 미국의 자동차시장 개방압력이 끝났다고 볼 수도 없다.
미국은 대한자동차수출이 지속적으로 늘어나지 않는한 관세인하요구는
물론 <>내국세의추가양보 <>자국산 부품구매 <>시장점유율 목표제시등
좀더 강도 높은 요구를 해올 가능성마저 있다.
한 통상전문가는 "WTO규범을 비롯해 국제적으로 합의된 무역관행과 합치
되는 개선사항은 미국의 요구가 없더라도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항은 국내 자동차산업의 장기적인 발전과 한미통상관계의
기본성격을 고려해 여유를 갖고 우리의 입장을 관철시켜야 했었다"고 지적
한다.
(고광철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