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사의 임직원들은 ''세계화''를 곧 ''토착화''로
이해한다.

사고의 대상은 전세계시장이지만 몸은 각 지역 시장요구에 맞게 순발력있게
움직이는게 이 회사의 강점이자 미덕이다.

미 텍사스주 댈라스에 본사를 둔 TI는 전세계 18개국에 생산설비를 갖추고
있고 30여개국에서 마케팅과 엔지니어링서비스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TI의 전세계 생산및 영업거점은 신제품개발에서부터 시장개척에 이르는
전과정을 본사의 지원없이 독자적으로 수행할수 있다.

그러나 각 거점들간 연대가 등한시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들어 TI는 북유럽에서 시장을 판단하고 미국에서 디자인해 남유럽에서
상품화,최종적으로 동남아에서 제품을 생산할수 있을만큼 각 거점간 분업
체계가 철저하다.

TI가 자랑으로 내세우는 "글로벌 로컬라이제이션"의 결과다.

TI사는 생산비용을 따지기 보다는 얼마만큼의 수요가 있고 소비자욕구를
얼마나 신속히 파악할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생산거점을 개척한다.

우선 제품을 생산하고 시장을 개척하는게 아니라 시장이 형성되는 곳에서
그 시장에 맞는 제품을 내놓는다는게 TI의 전략이다.

이런 전략에 힘입어 지난해 TI의 반도체칩 매출중 미국외 매출구성비가
65%에 달했다.

인텔과 모토로라가 절반이상의 매출을 여전히 미국시장에 의존하고 있는
것과 견줘보면 TI의 시장기반이 훨씬 안정적인 셈이다.

TI사는 올해 반기결산에서 61억달러의 매출에 5억800만달러의 순이익을
달성해 각각 창사이래 유래없는 기록을 만들어냈다.

이런 실적을 반영해 월가에서 TI주가는 올해초 보다 90%나 올랐다.

다른 반도체칩 제조업체들의 주가도 크게 올랐으나 TI주가 상승폭은 업종
평균보다 훨씬 컸다.

증권분석가들은 이를 TI 세계화전략의 성과로 해석한다.

TI가 독특한 세계화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중반부터.

당시 D램시장에서 TI는 아시아권 반도체생산업체들의 가격공세에 밀려
시장점유율이 급전직하하는 위기를 맞는다.

대부분의 미국 반도체업체들은 아예 D램생산을 포기하기도 했다.

이때 제리 전킨스 회장을 주축으로한 TI경영진은 상식을 뛰어넘는 결단을
내린다.

적과 맞서기 위해 "적과의 동침"을 결행한 것.

87년 일본 히타치사와 차세대 D램 개발을 위한 기술제휴에 들어간 다음부터
TI는 NEC AT&T 인텔 샤프 도시바 지멘스 등 기술이나 시장을 나눌수 있는
기업이면 무조건 손을 잡았다.

기술개발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는 것으로 일단 발등의 불을 수습한뒤
90년대초반부터 TI는 이탈리아정부, 대만의 PC생산업체 에이서, 일본의
고베철강, 싱가포르정부 등과 공동출자계약을 잇따라 체결하고 TI 생산기지
를 전세계 각지역으로 확장해 나갔다.

이런 자본합작으로 TI는 지금까지 약10억달러의 투자비용을 절감한 것으로
자체 평가하고 있다.

전세계에 뻗쳐 있는 TI 조직망은 기술제휴나 자본합작 등 다소 느슨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불협화음이 전혀 없는게 외부에서는 불가사의로
여겨진다.

만약 이탈리아 아베차노에 있는 TI반도체공장에서 미세한 먼지 때문에
기계에 이상이 발생했을 경우 미국 본사에서 입자분쇄기를 소지한 검진단이
투입되고, 대만과 일본공장의 생산관리자들도 한꺼번에 몰려들어 이상발생
원인을 찾아내고 치유법을 익히는게 TI의 기업문화다.

TI는 네트워크시대에 세계시장은 하나라는 인식아래 세계화전략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또 보급형 반도체외에도 디지털신호처리(DSP)용 칩, 멀티미디어컴퓨터,
고선명 TV 등으로 제품구성을 더욱 다양화하고 있다.

전킨스회장은 "지금까지 우리가 개척한 시장이 1,000억달러규모라면 앞으로
열려 있는 시장은 그 이상"이라고 강조한다.

< 박순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