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본것처럼 그렇게 줏대없는 자세로 학숙일을 돕던 가서가 희봉을
짝사랑한 나머니 상사병에 걸려 죽은지 몇달후 해가 바뀔 즈음에, 대옥의
아버지 임여해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임여해는 인편에 서신을 보내어 대옥이 보고 싶으니 속히 오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대부인은 그 서신을 받고 어떻게 대옥이 그 먼길을 다녀올지 염려가
되지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희봉의 남편 가련을 불러 대옥을 아버지에게 데려갔다가 다시
데려오라고 당부하였다.

가련과 대옥은 날을 정하여 대부인이 마련해준 선물들과 여비를
가지고 몇명의 하인들과 함께 배에 올라 임여해가 있는 양주로 떠났다.

보옥은 대옥이 떠나가자 마음 한구석이 비어버린듯 허전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부녀지정을 어찌 막을수 있단 말인가.

희봉도 남편 가련이 먼길을 떠나고 난후 일들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남편이 떠난지 며칠이 되었는가 하고 날수나 꼽으며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고 있기 일쑤였다.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언제즘 돌아올 것인지, 혹시 다른 여자를 만나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온갖 상념들이 머리속에 맴돌았다.

날이 저물고 밤이 되어도 몸을 섞을 남편이 없으므로 잠자리가
텅빈것 처럼 여겨지기만 했다.

욕정이 차오르면 자기손으로 젖가습을 만져보기도 하고 은밀한 곳을
더듬어보기도 하였지만 남편의 애무만큼 좋을리가 없었다.

그날도 시녀 평아와 더불어 등잔불 밑에 화로를 피워놓고 수를
놓다말고 잠자리에 든 희봉은 잠시 자기 몸을 스스로 애무해보고는
잠을 청해보았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잠이 들려고 할 무렵, 누가 문득 방 복판에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희봉이 쳐다보니 진가경이 아닌가.

가경은 지금 병석에 누워 있어야 할 몸인데. 희봉이 어리둥절하여
가경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려니 가경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이렇게 잠만 주무시고 계시면 어떡해요?"

"아니, 이 밤중에 무슨 일이에요? 몸이 다 나은 거예요"

"몸이 다 낫다니요? 난 벌써부터 내 병이 낫지 못할 것을 알았어요.

남편이 장우사라는 명의를 데리고 와서 진맥을 해보도록 하고
익기양영화건탕 같은 희귀한 약을 달여주기도 하였지만, 난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이제 기운이 다하여 이 세상을 떠나가려고 해요.

그래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 온 거예요.

근데 나를 바래다줄 생각은 않으시고 잠만 자고 계시다니요"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