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복-이상범 전/현노조위원장, 현대자 노-사갈등 두축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이영복 현대자동차노조위원장과 "양봉수씨 분신대책위"를 주도하고 있는
이상범씨(39.승용시작부).
이위원장은 초대에 이어 현재 제5대 노조위원장을 맡고있고 이씨는
89년부터 2년간 2대노조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노동계에 몸담고있는 사람들가운데 두사람만큼 악연을 이어온
경우는 드물다.
이들의 관계는 특히 현대자동차 일부근로자의 불법파업과 회사측의
무기한휴업조치가 노.노갈등으로 인해 불거져나온 것이어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있다.
이번 사태에 앞서 지난 93년 이위원장을 중심으로 출범한 제5대
노조집행부는 온건실리지향의 "경제조합주의"를 일관되게 추진해왔다.
"투쟁"중심의 대립구도에서 "협상과 설득"위주의 협력구도로 전환을
꾀해왔던 것이다.
이에대해 이씨는 재야에서(?) 현총련등 외부노동세력과의 교감아래
현노조집행부의정책을 비판하는등 제동을 걸어왔다.
이씨는 노보에 대항하기위해 "현자노동자신문"도 발행하고 있다.
이들이 처음 악연을 맺은때는 지난 87년9월초 초대노조위원장 선거때.
당시 회사의 사주로 들어선 어용노조를 서로 힘을 합쳐 몰아낸 두사람은
초대위원장자리를 놓고 맞닥뜨렸다.
1차투표에서는 이상범씨가 이겼으나 과반수를 얻지못했다.
이어 벌어진 결선투표에서 이영복씨는 역전에 성공, 초대위원장에
당선됐다.
그러나 9월중순경 회사측과 임금교섭을 벌이는 과정에서 이초대위원장의
"직권조인"과 노조규약개정을 둘러싸고 두사람간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관계자들의 얘기를 빌리면 이씨가 이위원장보다 다소 강성이었다는
평이다.
그후 2년동안 이씨는 집행부와 사사건건 마찰을 일으켰다.
노조대의원대회때 등을 돌리는가하면 옷을 뒤집어입는등 노골적인
반대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씨는 마침내 89년9월 제2대 노조위원장에 당선되었으나 이위원장과
마찬가지로 임금협상과정에서 "직권조인"시비에 말려 재선에 실패했다.
그뒤 3,4대 노조집행부아래 재기(?)를 꿈꾸던 이들은 이영복씨가
93년9월 5대위원장에 취임하면서 다시 갈등이 재연되기시작했다.
이씨는 자신의 옛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현노조의 각종
정책을 강력히 비판해왔다.
현집행부노선에 대한 분명한 반대입장을 밝혀왔다.
이과정에서 금년 8월로 예정된 제6대노조위원장 선거는 양진영의
긴장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는 두사람이 각각 추구하는 "경제조합주의"와 "정치조합주의"가운데
어느쪽이 조합원들의 지지를 획득하는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했다.
해고근로자 분신사건이 발생하자 이씨를 중심으로 대책위가 서둘러
구성된 것도 선거를 의식한 주도권다툼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현대자동차 불법파업과 노.노갈등의 요인으로 이처럼 개인적인 갈등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주위의 지적이다.
< 울산:조일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9일자).
이상범씨(39.승용시작부).
이위원장은 초대에 이어 현재 제5대 노조위원장을 맡고있고 이씨는
89년부터 2년간 2대노조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노동계에 몸담고있는 사람들가운데 두사람만큼 악연을 이어온
경우는 드물다.
이들의 관계는 특히 현대자동차 일부근로자의 불법파업과 회사측의
무기한휴업조치가 노.노갈등으로 인해 불거져나온 것이어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있다.
이번 사태에 앞서 지난 93년 이위원장을 중심으로 출범한 제5대
노조집행부는 온건실리지향의 "경제조합주의"를 일관되게 추진해왔다.
"투쟁"중심의 대립구도에서 "협상과 설득"위주의 협력구도로 전환을
꾀해왔던 것이다.
이에대해 이씨는 재야에서(?) 현총련등 외부노동세력과의 교감아래
현노조집행부의정책을 비판하는등 제동을 걸어왔다.
이씨는 노보에 대항하기위해 "현자노동자신문"도 발행하고 있다.
이들이 처음 악연을 맺은때는 지난 87년9월초 초대노조위원장 선거때.
당시 회사의 사주로 들어선 어용노조를 서로 힘을 합쳐 몰아낸 두사람은
초대위원장자리를 놓고 맞닥뜨렸다.
1차투표에서는 이상범씨가 이겼으나 과반수를 얻지못했다.
이어 벌어진 결선투표에서 이영복씨는 역전에 성공, 초대위원장에
당선됐다.
그러나 9월중순경 회사측과 임금교섭을 벌이는 과정에서 이초대위원장의
"직권조인"과 노조규약개정을 둘러싸고 두사람간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관계자들의 얘기를 빌리면 이씨가 이위원장보다 다소 강성이었다는
평이다.
그후 2년동안 이씨는 집행부와 사사건건 마찰을 일으켰다.
노조대의원대회때 등을 돌리는가하면 옷을 뒤집어입는등 노골적인
반대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씨는 마침내 89년9월 제2대 노조위원장에 당선되었으나 이위원장과
마찬가지로 임금협상과정에서 "직권조인"시비에 말려 재선에 실패했다.
그뒤 3,4대 노조집행부아래 재기(?)를 꿈꾸던 이들은 이영복씨가
93년9월 5대위원장에 취임하면서 다시 갈등이 재연되기시작했다.
이씨는 자신의 옛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현노조의 각종
정책을 강력히 비판해왔다.
현집행부노선에 대한 분명한 반대입장을 밝혀왔다.
이과정에서 금년 8월로 예정된 제6대노조위원장 선거는 양진영의
긴장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는 두사람이 각각 추구하는 "경제조합주의"와 "정치조합주의"가운데
어느쪽이 조합원들의 지지를 획득하는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했다.
해고근로자 분신사건이 발생하자 이씨를 중심으로 대책위가 서둘러
구성된 것도 선거를 의식한 주도권다툼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현대자동차 불법파업과 노.노갈등의 요인으로 이처럼 개인적인 갈등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주위의 지적이다.
< 울산:조일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