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통신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미국의 비상식적 요구는 끝이 없어
보인다.

지난달말 미전신전화회사(AT&T)의 신형 전화교환기 인증문제가 한국측의
일방적 양보로 타결된데 이어 이번에는 급성장시장인 네트워크 장비시장
쪽에서 불쾌한 마찰음이 들려오고 있다.

미통신업체인 시스코사가 한국의 관련 기업들과 합작회사 설립을
추진하면서 시장지배력을 앞세워 불평등조건을 강요해 국내 업체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네트워크 장비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시스코사는 국내
5대 PC(개인용컴퓨터)메이커들과 자본금 80억원 규모의 합작사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본금의 20%정도인 16억원만 내놓고 지분은
75%를 확보해 경영권을 행사하겠다는 상식밖의 요구를 내놓았다고
한다.

혹시 한국이란 나라는 미국의 요구라면 아무리 무리한 경우라도
결국 들어주고마는 인심좋은 나라 쯤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우리는 이러한 미회사의 오만한 요구가 지난달말에 타결된 굴욕적인
한.미통신장비협상의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시스코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합작을 추진하면서 합작파트너에게
국제관례에 어긋나는 부당한 조건을 강요한다는 것은 결코 용인될수
없는 일이다.

최근 한국의 네트워크 장비시장은 또다른 미국회사인 스리콤이
잠식하고 있고 한국 업체들도 자체적으로 일부 장비의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어 시스코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릴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한국업체들을 합작사안에 끌어들여
시스코제품의 판매확대와 함께 자사제품을 한국내 통신시스템 표준제품으로
정착시키겠다는 것이 시스코의 속셈인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외국 업체들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있는것은 한마디로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장비란 일반 PC를 정보통신망에 연결시켜 네트워크를 구축할때
필요한 장비로 국내시장 규모는 연간 7,000억~8,000억원에 이르지만
국내 업체들은 기술개발이 아직 초보단계에 머물고 있는 분야다.

때문에 국내기업들은 시스코사의 합작요구를 거절할 경우 불이익을
당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이라고 들린다.

물론 국내 업체간에도 이해관계가 엇갈려 공동대응이 쉽지는 않겠지만
이번만은 일치단결해 시스코의 부당한 요구를 철회시켜야할 것이다.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해 창피스런 선례를 남긴다면 앞으로 그와
같은 부당한 요구가 줄줄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외국회사의 부당한 요구를 물리치려면 우리도 하루빨리
기술자립을 실현하는 길 밖에 없다.

우리의 기술산업계가 공통적으로 겪고있는 전문인력 투자자금 핵심기술부족
등의 애로사항은 어느 한 업체나 주무부처의 노력만으로는 극복될수
없는 것들이다.

기업의 과감한 기술개발투자와 더불어 투자의욕을 북돋우기 위한
적극적인 범정부적 지원책이 절실히 요청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