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은 자신의 몸과 아내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논밭을 팔아 하인과 몸종들을 데리고 한적한 시골로
내려갔다.

그런데 액운이 겹치기로 작정을 하였는지 여러 해에 걸쳐 흉년이 들어
인심이 흉흉하게 되었다.

도적떼가 일어나 논밭의 곡식과 작물을 훔쳐갈 뿐만 아니라 집안의 돈과
보물들까지 털어가기 일쑤였다.

어떤 때는 강도로 돌변하여 사람들을 해치고 부녀자들을 덮치기까지
하였다.

군사들이 말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내달리며 도적들을 잡는다고 부산을
떨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여보,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이 지방에서는 더 이상 도저히 살 수 없는 형편이니 말이오"

사은이 비쩍 마른 아내 봉씨의 얼굴을 민망한듯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봉씨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아버님 댁으로 내려가 신세를 져야할 것 같아요.

아버님은 이런 흉년중에도 제법 살림을 넉넉히 꾸려가고 계시다고
하니 우리 식구들을 거두어주실 거예요"

"사내 대장부가 처갓집 신세를 지다니"

사은은 분통한 마음을 참느라고 이를 악물었다.

"그냥 무조건 신세를 지는 것은 아니지요.

이곳의 논과 밭을 팔아 그 돈을 아버님에게 맡기는 거예요.

그리고 그 돈으로 우리가 거처할 집과 가꾸어 먹을 밭뙈기 얼마라도
사달라고 부탁하는 거죠.

그러면 아버님 신세를 그렇게 지지않아도 될 거예요"

봉씨는 사은을 은근히 위로하고 격려하며 본가로 내려가는 방향으로
마음을 굳혔다.

결국 사은은 아내의 말대로 논밭을 다시 팔아 돈을 얼마 마련한후
몸종 둘만 데리고 처갓집으로 향했다.

사은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는 다른 하인들과 몸종들은 눈물로 작별을
고하고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사은이 데려간 몸종들 중에 봉씨를 오랫동안 따라다닌 교행이 들어
있음은 물론이었다.

사은의 장인은 대여주 출신으로 이름이 봉숙이었다.

봉숙은 농사만 지어온 사람이었지만 수완이 좋아 살림을 꽤 불려나가
그 지방에서 부자소리를 들으며 사는 편이었다.

그런데 사위가 가산을 다 날린 채 식솔들을 데리고 내려왔으니 속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은이 처음에는 가지고 온 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봉숙이 더욱 부담을 느끼고 언짢은 마음이 되었던 것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