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엔고"라는 비수를 들이대며 일본을 벼랑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일본이 시장을 대폭 개방하고 무역흑자를 줄이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벼랑 아래로 밀어버리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심판격인 외환시장도 최근에는 사실상 미국을 편들고 있다.

시장은 미일무역불균형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나타나지 않는한 "엔고" 페이스를 늦추지 않겠다는 강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일본이 지난 14일 긴급엔고대책을 발표하고 재할인금리를 대폭
낮추었는데도 외환시장은 고개를 가로젖기만 한다.

미봉책으로 대충 위기를 모면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시장은 19일 끝내 달러를 80엔 아래로 떨어뜨려 버렸다.

시장의 신호를 무시한 일본에게 "옐로카드"를 내보인 셈이다.

달러가 70엔대로 떨어진 요인은 한마디로 일본의 거대한 대미무역흑자(지난
해 6백57억달러)와 연간 2천억달러에 육박하는 미국의 재정적자이다.

외환시장에는 이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확실한 대책이 나오지
않는한 엔고가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물론 일본은 엔고를 저지하기 위해 긴급엔고대책을 내놓는 등 나름대로
성의를 보였다.

1백여일만에 엔화가 달러화에 대해 20%이상 급등,엔고가 자국 기업들이
견딜 수 있는 한계상황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내놓은 엔고대책은 시장으로부터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확실한 흑자감축 조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재할인금리를 1.7 5%에서 1%로 대폭 인하한 것도 시기를 놓쳐 엔고를
막는데 기여하지 못했다.

달러 가치가 급락해도 미국은 느긋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엔화에 대해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일본 상품의 대외경쟁력이 약화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양국간 무역불균형 시정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미국은 달러급락을 묵인하거나 심지어는 이를 은근히
조장하고 있다.

16일 열린 미일재무회담에서 로버트 루빈 미재무장관은 일본의
긴급엔고대책에 불만을 표시할 뿐 달러 급락을 막을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19일 달러가 70엔대로 떨어진 직접적인 계기는 17일과 18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일고위급 자동차협상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는 사실이다.

외환투자자들은 자동차협상이 쉽게 타결되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번 협상은 결과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매우 불만스러웠다.

협상에서 양국 대표 협상후 상대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미국은 가까운 시일내에 무역보복을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미일자동차협상 결렬은 지난 14일 발표된 일본정부의 엔고대책의
미미한 효과마저 희석시켜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은 오는 25일 열리는 선진 7개국(G7) 재무회담에 기대를 걸고
있다.

최근 에드몽 알팡데리 프랑스 경제장관,미셀 캉드시 국제통화기금
(IMF) 총재 등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달러 급락을 묵인하는 미국을
질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일의 미일재무회담으로 미뤄보아 G7 재무회담에서도 이렇다할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5월초 열리는 미국 일본 유럽연합(EU)의 3자통상회담에서 EU가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도 있지만 미국의 입장은 확고하다.

이번에는 일본으로부터 확실한 양보를 받아내지 않는한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무작정 제3자의 중재만을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제 엔고를 저지할 보다 강력한 대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효과를 거둘만한 새로운 엔고대책으로는 재할인금리를 또다시 인하하는
방안,무역흑자 감축에 관한 수치목표 설정하는 방안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일본 관료들이 "항복"이나 다름없는 수치목표 설정에 과연
동의하느냐가 최대의 관심거리로 부상했다.

미국은 그동안 일본 관료들의 경직성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본 산업계와 경제학자들도 무역흑자를 줄여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일본 관료들은 흑자를 줄이기 위해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흑자감축 수치목표를 설정하는 데는 매우 소극적이다.

일본은 지난달 30일 독일이 재할인금리를 인하했을 때 곧이어 재할인금리를
낮추고 엔고대책을 내놓음으로써 외환시장의 엔고 분위기를 한순간에
바꿔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관료들의 고집으로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호미로 막을 사태를
가래로도 막지 못하고 있다.

지금 상황으로는 미국과 G7이 달러 급락과 엔화 급등에 관한 대책을
내놓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결국 결자해지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거대한 무역흑자를 내면서도 시장개방을 등한시해온 일본이 스스로
매듭을 푸는 도리밖에 없다는 얘기가 일본에서도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미일무역분쟁이 타결되기까지는 엔고 추세가 누그러지지 않을 것이라는게
외환시장의 대세이다.

외환전문가들은 무역분쟁이 해결되지 않는한,일본이 무역흑자를
줄일 확실한 대책을 내놓지 않는한 엔고가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단기적으로는 엔화가 75엔대까지 오를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 프랑스 이탈리아 선거를 앞두고 유럽 정국불안 우려가 재등장하면서
독일 마르크화가 다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점도 달러 추가하락(엔화
상승)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졌다.

< 김광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