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 김용렴과 황거복이가 동학당에 들어가 지방안녕을 해치는가 의심하여
본부재판소에 잡아들여 심문을 한 결과 피고의 범죄한 증빙이 정확하지
않은지라 무죄방송할 것이라"

우리나라 근대사법사상 1호판결은 동학에 가담한 혐의로 붙잡힌 두 농민에
대한 형사사건에 대한 선고였으며 재판결과는 증거부족으로 인한 무죄선고
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17일 대법원이 근대사법 1백주년(4월25일)을 맞아 우리사법
의 뿌리를 찾기위해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된 구한말(1894년)이후의 판결문
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확인된 것이다.

대법원에 따르면 이 판결문은 1895년4월1일(양력 4월25일)재판소의 구성과
체계를 정한 재판소구성법이 시행된지 9일만인 4월10일에 선고된 것으로
담당판사는 법부참의(법무부국장)를 지낸 장박판사였다.

결국 우리나라 근대사법은 증거주의에 따른 무죄판결로 시작된 셈이다.

또 판사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것도 이 재판소구성법 시행에 따라
장박을 비롯, 서광범 임대준 이재정 조신희등에 판사보직을 내리면서부터
였다.

우리나라 판사수는 최초 5명에서 출발, 1백년만에 2백53배가량인 1천2백
64명으로 늘어난 셈.

판결이라는 용어도 1895년3월2일 의금부가 의금사로 개칭된 뒤 다시
법무아문권설재판소로 바뀌면서 처음으로 사용됐으며, 재판소라는 말도
이때부터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엔 중요사건은 대부분 고등재판소에서 1심이자 종결심으로
처리, 항소를 못하도록 해 3심제의 실현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고기완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