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영하2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밤,팬티와 훈련화만을 신은 육사1학년 생도들을
집합시켜 왕복400m나 되는 눈위를 낮은 포목을 시키기전 구대장이 읊었다는
푸쉬킨의 시한 구절이다.

30년전 그 훈련을 받았던 예비역대령 지만원씨는 그의 저서에서 "비록
그러한 가혹행위가 강인한 체력과 정신을 기르기 위한 생도, 기초훈련의
하나였다고 해도 그것이 군인으로서의 인생관을 정립하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일제세대의 하사관문화를 맹목적으로 전수,"선배들의 사랑"으로 미화시켜
자행했던 갖가지 기합을 소개하기도 한 그는 "육사 선후배간의 인연은
"기합"으로 맺어진 것이며, 육사 동기들간의 인연은 "선착순"으로 맺어진
것"이라는 냉소적 비판도 서슴치 않고 있다.

일반대학생은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이런 환경속에서 그 한계를 극복해가며
그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 육사 출신 인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출세지상주의 군사문화권에서 밀려나야 했다.

70년대말까지만 해도 사회에서는 그래도 정규육사 출신에 대한 인식은
그런대로 좋은 편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육사출신 장교들은 선배 정치
장교들을 찾아 줄대기에 바빴다.

"상풍하속"이란 말처럼 선배들이 하는 일은 후배들이 본받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담담했던 군사정권때의 이야기다.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서 위탁교육을 받고있던
젊은 중위 한 사람이 벌인 은행강도 행각을 온 사회가 충격을 받고 있다.

문민정부시대에 들어와 직업군인이 상대적인 좌절감을 느낀데서 저질러진
범행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애당초 잘못된 육사의
교육제도라는 지적이 우세하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을 육사라는 작은 성속에 폐쇄시켜 놓고
훈련과 성적경쟁만 시켜서는 옳바른 장교가 나올리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현역아니면 예비역 육사출신만으로 구성된 교수진이다.

미국의 웨스트포인트의 교수진이 10%정도만 현역이라는 점과 아주
대조적이다.

과거의 것은 죽어가고 있지만 새것은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은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식의 운명론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이번 사건이 비젼있는 장교를 키울수 있게 하는 교육제도 마련의 계기가
됐으면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