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연부터 이렇게 구성지게 시작되는 김시습의 "기농부어"(어느 농부
이야기)라는 서사시 한편이 "매월당전집"에 수록돼 있다.
한 농부가 자신의 삶이 파탄에 이른 경위를 토로한 내용이다.
이 농부는 비옥한 농토를 꽤 많이 경작했었는데 한발 홍수등 천재가 겹친
데다 부역이라는 공적수탈과 토호의 사적수탈로 가진 것을 모두 박탈당하고
굶주려 보채는 어린자식들의 정황을 절박하게 술회하고 있다.
조선왕조 초에 추구했던 "인정" "우민이라는 정첵이 공염불이 되고 체제적
모순을 들어내 자궁농민층이 몰락하기 시작하던 15세기 후반의 전형적 사례에
속하는 이야기다.
"나라라는 것은 민의 나라다"(국자민지국)라고 했던 김시습이 이시를 지을
때는 농민이 대부분이었던 "민의 나라"는 이미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조선왕조가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끝나때까지도 여전히
이어졌다.
그것은 농업위주의 한국전통사회의 비극이었다.
1960년대이래 계속 추진해온 국가주도의 대외지향적 경제발전의 결과 이제
한국은 농경사회에서 공업과 서비스위주의 산업사회로 탈바꿈했다.
57년까지만 해도 농업인구가 총인구의 59%이던 것이 지난해는 12% 감소했다.
이제는 농업도 국제경제력을 갖추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
날씨만 변덕을 부리지 않고(우순풍조)열심히 일만하면 풍년을 맞아 잘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농민각자가 전문기업인이 되어 농업을 키워갈 수 밖에 없다.
200만 농민조합원을 가진 농협이 새해들어 조합원들의 명함을 만들어 선물
할 계획이라고 한다.
농민들이 명함을 사용케 함으로써 전문인으로서의 확고한 직업의식을 갖도록
하고 품질향상과 신용거래풍토조성에도 효과를 거둘수 있다는데서 나온 생각
인듯 하다.
일찌기 다산 정야용은 정조에서 올린 소에서 "농사일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경작할 사람이 모자라고 좋은 종자를 택하지 않으며, 농기구가 너무 유치하기
때문" 이라고 지적했다.
또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는 이유를 "대우가 선비만 못하고 이익이 상업만
못하고 편안하기가 공업만 못하기 때문"이라고 명쾌하게 분석했다.
그러나 그당시 조정에서는 "낸들 어찌하랴"는 한국인 특유의 사고방식으로
뒷짐만 짚고 있었다.
농민들도 낸들 어찌하랴"의 사고에서 벗어날 때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