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그레헴 벨이 전화에 관한 특허를 신청한지 한 시간뒤, 에리사
그레이라는 사람이 똑같은 발명품으로 특허를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에리사
그레이라는 이름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는 2등이었습니다"

모대기업그룹의 기업이미지 광고에 실린 문구다.

"세계일류-한국경제의 마지막 선택입니다"라는 제목의 이 광고는 이렇게
이어진다.

"기업간의 국제경쟁은 전쟁.전쟁에서 2등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세계 최고의 제품과 1등 상표로 승부를 걸어야만 산다-.

해외시장은 물론 문턱이 낮아진 안방시장에서까지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생존을 건 경쟁을 벌이지않을 수 없게 된 국내기업들에 주어진 명제다.

"초1류"야 말로 국경없이 펼쳐지는 경제전쟁에서 한국 기업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기도 하다.

세계무역기구(WTO)체제가 출범의 고고성을 울릴 95년이 눈 앞으로 다가선
이 즈음, 서른한돌째 무역의 날을 맞는 "장년 수출한국"의 전사들이 갖는
감회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

WTO체제 발동과 더불어 세차게 몰아닥칠 개방 파고에 대비하는 일이
발등의 불로 떨어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어느 정도 정부의 보호와 지원속에서 몸을 추스를 수 있었지만
앞으론 기업들의 철저한 "홀로서기"가 불가피해졌다.

더구나 오는 96년부터는 한국이 선진국 경제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가입하게 된다.

국내의 각종 제도를 선진국 수준으로 뜯어고쳐야 하는 건 물론이고 교역
상대국들로부터 받아 온 "개도국 대접"도 더이상 누릴 수 없게 된다.

정부가 기업들에 제공해 온 일부 금융.세제상의 지원조치가 막을 내리는
동시에 외국정부가 한국기업들에 줘 왔던 저관세율 쿼터특별배정등의
혜택도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조짐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유럽공동체(EU)가 내년부터 일반 특혜관세제도(GPS) 수혜대상 개도국에서
한국을 제외키로 한게 그 첫 신호탄이다.

미국 연방의회는 WTO 이행법안 심의과정에서 한국을 개도국이 아닌 선진국
으로 분류, 정부보조금 세제지원등을 선진국과 같이 WTO협정 발효 3년내에
모두 폐지토록 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선진국 취급"을 받게 된 건 기업들에 있어 양면성을
갖는다.

기업들이 땀흘리며 일궈온 "수출한국"의 금자탑이 한국의 선진국문턱
진입이라는 결실로 나타난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이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 우리 기업들은 세찬 국제경쟁무대에서 온 몸으로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맞부딪쳐 싸울 수 밖에 없게 됐다.

뿐만 아니다.

한국의 수출기업들을 둘러싼 거시경제적 상황도 결코 유리하지 않은 상황
이다.

국제금리가 치솟는 가운데 원화환율은 절상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절대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원자재의 국제가격도 큰 폭의 상승국면
으로 접어들고 있다.

80년대 후반 "수출 한국"의 절정을 이뤘던 당시 우리 기업들을 도와줬고
올초 다시금 찾아오는 듯 했던 저금리-저달러-저국제원자재가라는 "외생
3저호재"가 돌연 "신3고"로 1백80도 커브를 틀고 있다.

어느 모로 보나 우리기업들에 유리한 상황은 보이지 않는다.

처방은 단 한가지다.

외부상황이 어찌 됐건 흔들리지 않을 기업내부의 경쟁력과 자생력을 탄탄
하게 갖추는 일 뿐이다.

이것이 "수출 한국" 서른한돌을 맞는 우리기업들에 주어진 명제다.

유.소년기와 청년기에는 외부의 보호를 받는 일이 가능했지만 30대 장년기
에 접어든 수출 한국은 스스로의 두 발과 두 손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밖에.

이런 기업들의 홀로서기가 결코 어려운 과제만은 아님이 이미 일부 품목
에서 웅변으로 입증되고 있다.

전자 자동차등 "메이드 인 코리아"가 뚜렷한 우리상표를 달고 세계 곳곳의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일궈내고 있는 것이다.

일본 미국 유럽등 유수 해외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당당히 이겨내고 있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품목이 컬러TV VTR 전자레인지 냉장고등 가전제품과 승용차다.

삼성전자의 컬러TV는 헝가리와 포르투갈에서 14~23%의 수입시장 점유율을
기록, 필립스(네덜란드) 소니(일본)등 쟁쟁한 업체들을 제치고 선두에 올라
있다.

같은 삼성의 VTR와 오디오제품도 스페인 수입시장의 11~14%를 점유, 92년
부터 소니를 따돌렸고 팩시밀리는 마쓰시타를 제치고 영국시장의 20%를
점유하고 있다.

금성사는 칠레 튀니지 이집트 요르단 페루등 6개국에서 세탁기 컬러TV
VTR등의 시장점유율이 17~80%에 달해 현지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대우전자는 대만시장에 올들어 8월말까지 작년 한햇동안과 같은 5만대의
공기방울세탁기를 수출, 일본의 마쓰시타를 제치고 선두에 올랐다.

자동차부문에서는 단연 현대가 해외시장 개척을 선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올 상반기중 호주에서 엘란트라 쏘나타등 승용차를 1만1천3백
80대 수출, 수입차 시장점유율 13.8%로 지난해까지 1위를 지켰던 일본
자동차회사들의 기를 죽였다.

중남미의 푸에르토리코에서도 같은 기간중 8천6백90대를 판매, 수입차
시장점유율 16%를 차지하면서 미국과 일본 자동차회사들을 제치고 "1등
기업"의 자리에 올라섰다.

대우와 기아도 이란 레바논 알제리 나이지리아 브라질 시리아등에서
점유율 1위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대형 품목들에서만 우리 기업들이 힘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운동화에서는 국제상사 코오롱 성화가, 피아노에서는 삼익악기와 영창악기
가, 테니스공에서는 낫소와 한일신소재가, 모자에서는 유풍실업 영안모자
상사등이 미국 유럽등지의 시장에서 당당 선두자리에 올라서 있거나 등극을
눈앞에 두고 있다.

"세계 제1"을 차근차근 실현해 나가고 있는 기업들의 이런 몸놀림에 정부도
"기술드라이브"라는 정책으로 화답할 태세다.

특히 아직 우리기업들의 기술경쟁력이 취약한 전자.전기 기계 철강 화학
등의 핵심소재와 부품분야의 기반기술육성에 주력하고 있다.

상공자원부가 올초 신철강 액정소자(LCD) 멀티미디어등 12개 핵심기술을
중기 거점기술개발사업으로, 차세대자동차 항공우주개발사업등을 장기 대형
기술 개발사업으로 선정해 기업들을 지원키로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국제적 비교경쟁력을 갖춘 주요 품목별로 한국을 대표할만한 업체들을
발굴, "수출상품 일류화사업"을 실시하는등의 마케팅사업에도 노력을 쏟고
있다.

숙명처럼 다가오고 있는 "무한경쟁시대"에 우리기업들이 살아남고 WTO개방
파고를 "제2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전기로 삼기 위해서는 민관의 공동대응
노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상황이다.

민도 관도 "1등" "초1류"를 향해 신발끈을 고쳐매야 할 때다.

< 이학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