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차로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쓰구미치가 오쿠마와 함께 대만을 향해
나가사키항을 출발한 것은 5월17일이었다.

선발대를 출항시킨지 20일만이었다.

그러니까 대만 정벌,즉 도요토미 시대 이래의 첫 해외 원정을 실질적으로
성사시킨 것은 스물여덟살 먹은 육군중장인 사이고 쓰구미치인 셈이었다.

그가 그처럼 배짱을 부려 독단적으로 출병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해외
정벌이라는 침략의 첫 손길은 내뻗어지지 않았을지도 알수 없었다.

쓰구미치가 탄 다카사마루가 대만의 낭교라는 곳에 도착한 것은 닷새 뒤인
22일이었다.

먼저 도착한 선발부대는 산발적으로 토벌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제2진인
주력부대는 포진을 하여 사령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쓰구미치는 그 부대들과 합류를 해서 6월1일에 모란사를 향해 진격을 개시
하였다.

대만의 원주민 중에서도 원시인에 가까운 생번은 추장을 중심으로 부족사회
를 이루어 동부 산악지대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모두 18개사(사:집단)였다.

그 가운데서 가장 세력이 강하고 포악한 것이 모란사였고, 그들이 류큐인을
학살했던 것이다.

대포와 기관총, 그리고 소총등 신예무기로 무장한 삼천명이 훨씬 넘는
군사가 한 부족집단을 공격했으니, 그 결과는 뻔했다.

하루만에 쑥대밭을 만들어 버렸고, 그 추장을 붙들어 댕강 목을 잘라
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그날밤에 일어났다.

살아서 도망친 모란사의 생번이 이웃 다른 생번들과 연대하여 야간 기습을
해왔던 것이다.

칼과 창, 그리고 활뿐인 그들이었지만, 용맹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추장의 피살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를 갈며 짙은 어둠속으로 비호의 떼서리
같이 날아들어 닥치는대로 일본 군사를 해치웠다.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중의 기습에는 대포도 기관총도, 그리고 소총도
소용이 없었다.

칼로 대적하는 길밖에 없었는데, 칼싸움이라면 자신이 넘치고도 남는
사무라이 출신의 병사들도 자다가 당한 터이라 제대로 솜씨를 부려보지도
못하고 무수히 쓰러졌다.

낮의 모란사 공격에서 거둔 전과보다도 그날밤 일본군은 더 많은 희생자를
냈다.

분노한 사령관과 지휘관들은 이튿날 작전회의를 개최하여 다른 생번들까지
모조리 토벌하기로 하여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밤의 경계를 철저히 하게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생번들은 차례차례 패주하여 깊은 산중으로 숨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