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란 물음에 대해 칼 포퍼는 "역사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단언한다.

"인류의 역사"라고 할때 사람들이 염두에 두는 것은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제국등의 역사일테지만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허구적인 정치권력의 역사일 뿐이다.

정치권력의 역사란 횡령 약탈등 국제적 범죄와 독살 대량학살의 역사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흔히 기독교에서 역사는 "의미"를 갖고 있고 바로 그 "의미"가 신의 목적
이라는 "역사에 있어서 신의 계시이론"을 내세우지만 그런 역사는 존재
하지도 않고 또 존재할 수도 없다.

그것은 신을 모독하는 주장일 뿐인데도 인간의 본능인 힘과 성공에 대한
우상숭배가 그것을 진실로 믿게한다.

따라서 신은 허구적인 역사의 예언자가 되어 버리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동일시되며, 개인적 이기주의를 집단적 이기주의로 대체시킨 집단주의와
박애주의가 동일시되어 역사적 성공에서 신의 의지가 나타난 것을 보려고
한다.

그것은 우상숭배이며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포퍼는 "개방사회와 그 적들"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도덕론을
종교적 예언에 비유,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등 역사주의자들이 사회전체의 발전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어 미래를 틀림없이 예측할수 있다고 한 것은 사회과학의
본질면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신비한 비인격적인 힘이 대전제가 되어 있는 이런 이론은 미래를 점친다는
점에서 매혹적인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인간지식의 성장 자체가 역사과정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역사 자체는 과학적 천재의 창의력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인간은 지식의
성장과 그것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예견할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정치가에게 최대다수의 고통을 최대한으로 감소하도록 하는 것을
도덕적 명제로 제시한다.

그의 "점진적 발전론"이라는 것도 이런 바탕에서 나왔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꼽혔던 칼 포퍼(1902~94년)가 지난
17일 타계했다.

"역사 자체는 목적도 의미도 없지만 우리는 거기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결심을 할수 있다. 우리는 우리 운명의 제작자가 되어야 한다. 역사는
그것을 절실히 바라고 있다"

비판적 합리주의를 추구했던 포퍼는 끝까지 인간이성을 신봉한 "희망의
철학자"였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