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아침 무심결에 바라본 창밖의 가로수 그 넓은 잎새들이 다시
무성해졌다.

작업실 책상에 앉으면 마주보이는 예쁘지않은 가로수잎은 단풍이 들면
밉게 생긴 그대로, 바람이 불거나 비에 젖으면 빗방울에 흔들리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마음을 달래주는 작은 자연이고 아름다움이었다.

그런데 작년 초겨울께 가로수 정비작업을 한다고 나뭇가지들을 뭉텅 잘라
내어 갑자기 허전해진 창밖을 보며 가슴이 울적하고 삭막해졌었다.

그러나 이 여름 새가지들은 다시 힘찬 모습으로 잎새들을 뻗으며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음에 이번 장마비는 이 잎새들과 더불어 견딜수 있겠구나 싶어
잠시 즐거웠다.

서울을 다시 아주 떠날까 하고 정리하던 때가 있었다. 이유는 서울에서
사는것이 불편하거나 서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감성의 응집체로서 방어능력이 없는데다 사람을 무조건 믿어버리는 습성
으로 인해 상처투성이가 되어 자괴뿐인 어둠속에서 헤매고 있었고 참으로
이땅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봄날 갑자기 무엇에 홀린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곳에 존재해야 했고
스스로에게 한 단호한 약속, 옷과의 (연)을 끊으리라는 결단을 깨뜨리고
천직인 침모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했다.

S백화점과의 제휴조건이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침모가 옷을
만드는 영역을 인정해주는 직사입제인데다 백화점의 직영브랜드를 창출하는
것이기에 바람직한 길이었다.

더욱 중요한건 소비자의 이익을 위해 백화점의 유통마진을 반으로 줄여
고품질의 상품을 중저가로 판매하겠다고 밝힌점이었다.

그같은 의도는 싸고 좋은 상품을 만들고 싶어했던 내 사고와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싸고 좋은 옷을 내놓자. 그러니 좋은옷만 만들고 싶은 침모에겐 신명나는
일일수밖에. 신이 들리지않고 어느 침모가 하루종일 안경끼고 마름질이며
인두질을 할수 있겠는가.

하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에서 부푼꿈을 안고 귀국한후 5년반
이라는 세월동안 나는 소비자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것일까.

상당한 시간이 지난데다 유통개방이 되었기에 좋은 상품은 알아주겠지
하며 시간을 내 매장을 돌아다니며 소비자의 반응과 기대를 들어보았다.

직접 일선에서 피부로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고품질 중저가의 상품에
놀라는 소비자도 있었다.

하지만 싸니까 품질이 떨어지는 옷이려니 하는 소비자 앞에서 나는 열심히
설명을 했다. "싼 옷이 별수 있겠어요"라는 소비자의 불신 깊은 한마디에
슬퍼져 그만 돌아서 눈물을 흘린적도 있었다.

이 거대한 불신의 늪, 아무리 튼튼한 믿음의 실, 진실의 실을 엮어 짜도
믿어주지 않는 이 풍토의 아픔울 누구의 탓이라고 돌릴수 있을까.

믿음은 상대적 선과 악을 그 주고받는 무게만큼 수반하거늘 이것이
어떤이만의 탓이라고 몰아붙일수 있는 것일까. 불신은 절망뿐인 것을
우리모두 감지는 하고 있을까.

나는 나의 일 그안에서 진과 선을 찾아 헤매려 했었고 거기에 내혼과
생명을 걸었었다고 자신있게 얘기할수 있을 것인가.

창을 열고 보는 하늘, 그 아름다움을 기쁨속에 기억하고 싶다.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 깊이 정든 이땅에서 조그마한 들풀뿌리에서까지 갖게되는
작지만 큰 믿음 소신, 그리고 사랑으로 싸고 좋은 옷을 만들기 위해 외길을
가리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