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선약수. "물 흘러 가듯 자연스러운 것 처럼 좋은 게 없다"는 노자
도덕경중의 한 구절이다.

"길버트 그레이프"는 이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영화다.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느끼도록 강요하기 보다는 그저 일어날 만한 일들을 흐르는
강물처럼 열거해 놓을 뿐이다. 오히려 그속에서 두고 두고 곱씹을 만한
감동이 잔잔한 파문처럼 전해지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가족의 사랑과 결속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미국아이오와주의 작은 마을 안도라에서 식료품 점원을 하고 있는
길버트 그레이프는 한 가족의 실질적 가장이다.

그레이프가에는 애물단지들이 많다. 어머니는 남편이 자살한 이후 그
충격으로 7년간이나 집 밖을 일절 나가지 않아 몸무게가 225Kg이나
나간다. 그녀가 집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집 전체가 흔들거려 지하실에
버팀목을 대야 할 정도다.

이제 곧 18살이 되는 남동생 어니는 정신연령이 어린아이 수준인
정신박약아다. 주위의 관심을 끌기 위해 틈만나면 동네 물탱크 같은
높은 곳에 올라가 길버트의 혼을 빼 놓는다. 18살이나 됐지만 목욕조차도
혼자서 하지 못한다.

여동생 엘렌은 집안일에는전혀 관심이 없다. 일광욕이나 즐기며 멋내기
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이같은 가족의 울타리속에서 식구들이 보여주는
훈훈한 애정들이 이 작품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어니에게 있어 길버트는 떼 놓을 수 없는 분신이다. 형이 있기 때문에
그의 존재도 가능하다. "가위 손"의 조니 뎁(길버트역)과 "레인 맨"의
더스틴 호프만을 연상케 하는 헐리우드의 샛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어니역)가 이뤄내는 형제애는 뭉클하다.

어머니의 막내 아들에 대한 사랑은 극진하다. 걸핏하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어니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경찰이 그를 유치장에 가두었을 때
어머니는 7년만에 첫 외출을 감행한다.

"육지에 오른 고래"같다는 주위의 놀림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보는 각도에 따라 한 인간의 성장기를 다룬 것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개 같은 내인생"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감독 라쎄 할스트름이
"몽유병 환자처럼 살아가는 한 인간이 무감각해진 의무감을 던져 버리고
방치돼 있던 자신을 되볼아 보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이야기"라고 제작의 변을 밝힌 것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길버트는 따듯한 마음씨와 책임감으로 집안을 이끌어 가는 헌신적
가장이기도 하지만 그의 머리속에는 늘 삶의 무의미함에 대한 회의가
도사리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음악없이 춤을 추는 것" 같다고 느끼는 그의 생활에 "계몽의 돌"을
던지며 등장하는 사람이 아리따운 소녀 베키다.

오랜 여행으로 나이에 비해 깊은 이해심을 갖고 있는 베키는 길버트에게
미래에 대한 꿈을 갖도록 일깨워 준다.

헐리우드의 젊은 스타들의 개성있는 연기도 볼거리 중의 하나. 조니
뎁의 우수에 찬 표정과 "케이프 피어"에서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줄리엣 루이스(베키역)의 청순함이 돋보인다.

정박아를 거의 완벽하게 해낸 디카프리오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에 노미네이트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가족들끼리 혹은 연인들이 손잡고 가 볼만한 영화다. (하명중 영화사수입
11일 뤼미에르, 피카소, 동숭아트센터, 이화예술, 건영옴니시네마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