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배하여 금융회사 설립에 착수하였다.
은행 점포에서 쏟은 열정과 노력을 금융 회사에 그대로 쏟아 붓는다면
반드시 성공할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다만 자본이 문제였다.
내 자본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미원그룹의 임대홍회장과 해태제과의
박병규사장과 동업하기로 최종 합의하였다.
나는 정부의 허가를 받기위해 관계요로를 쉴 새 없이 뛰어다닌 끝에
마침내 재무부로부터 대한투자금융 설립의 내인가를 받아 내는데 성공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73년 7월13일 대망의 대한투자금융을 창립하게 됐다.
나는 출자 임원으로서 전무이사에 취임하였고,사장으로는 은행장 출신의
박대진씨를 영입하였다. 이와함께 신입 사원은 창업 원년에서부터 공개
채용을 통해 선발하였다.
이는 인재를 적정하게 선발하여 기업의 기초를 단단히 다지고자 하는 내
의지의 발로였다.
당시 업계에서는 서울투자금융 한양투자금융 한국투자금융등 3개 선발
투자금융업체가 6~7개월 전에 허가를 받아 이미 활발한 영업활동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경주해야
했다.
나는 초창기부터 단기 소액자금이라도 진심으로 환영하겠다는 방침을
설정하였다. 이에따라 대한투자금융은 개업과 동시에 "단 하루를 맡겨도
이자를 드립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로 단기 금융시장을 집중 공략해
나갔다.
이 슬로건은 결과적으로 고객들에게 크게 어필하였고 수신고는 눈에 띄게
늘어났다. 그리하여 대한투자금융은 창업 한달 만에 기존 업체와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대한투자금융은 창업원년에서부터 엄청난 이익을 냈다. 전 직원이 기존
업체를 능가해야 한다는 사명감 아래 혼신의 힘을 기울인 노력의 결실
이었다.
나는 우리 직원들에게 말로 다 할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이에따라 직원들의 급여 체계를 대폭 개선해 투자금융 4개회사 가운데
가장 많은 봉급을 지급하였으며, 매월 1백%의 상여금도 지급하였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상여금을 너무 많이 주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하여 나는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었다.
요컨대 월급을 가장 많이 주는 기업,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기업, 배당을
가장 많이 하는 기업이라야 가장 유능한 인재를 확보할수 있으며, 그러한
기업이라야 성장을 거듭하면서 국민복리에 쓰일 국부를 쌓아 사업보국의
지름길을 열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개업 인사차 허가 당국인 재무부를 방문하여 남덕우장관을 예방
하였다. 금융 회사를 허가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남덕우장관은 오직
금융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것만이 허가권자를 돕고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참으로 그 분의 인품에 고객를 숙이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거상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끝없이 집념을 불태워 왔다.
그리고 여러사업에 손을대면서 실패에 따른 여파로 실의와 좌절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기회가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고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생활에 있어서 "적당히"는 있을수 없었다. 언제나 최선이
있을 뿐이었다.
한편, 나는 지난날의 경험을 소중한 자산으로 간진하고 있다. 약관 20대에
지방 재력가들과 어깨를 겨루며 주조장을 경영했던 경험은 내 인생에 있어서
훌륭한 자산이 되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8.3조치"이후 금융게의 지각 변동이 예측되고 있을 때 나는
과감히 대한투자금융 창업을 결심할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