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창] (17) 판소리 은희진씨..동초제 맥 이어온 스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판소리계엔 "정승 나기는 쉬워도 명창나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다.
"명창이 되려면 논두렁정기라도 타고나야 한다"고도 한다. 명창의 길에는
이처럼 산도 많고 골도 깊다.
판소리를 배우려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명창에 뜻을 두고 일로매진하는
이들은 오히려 줄어들었다는게 원로들의 지적이다. 특히 여자소리꾼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데 반해 남자소리꾼들은 차츰 줄어들어 우려를 낳고
있다.
"역사에 남은 명창들은 가정을 버리면서 소리에 매달렸죠. 가족중심세태가
확산돼 부양이 우선인 풍토라 남자소리꾼들이 줄고 있어요"
국립창극단의 중견소리꾼 은희진씨(48)는 쉰이 다된 그가 아직도 주요
공연에서 이도령 심봉사 흥보 등 주요배역을 도맡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은씨보다 10년 아래의 여성후배들이 이미 주역을 더 젊은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조역 단역으로 지도.후원에 전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작정 소리가 좋아서 시작했지요. 득음의 목표를 정하고는 흔들림이
없었죠. 요즘엔 열정들이 없는 것 같아요"
은씨는 동초 김연수명창(1907~71)에게서 시작된 동초제판소리의 맥을
잇고 있는 소리꾼이다. 판소리창자 중 서편제 동편제를 가리지 않고 좋은
더늠을 찾아 판소리 모든 유파를 섭렵해온 묘한 경력의 소유자.
"천직이 되려고 그랬는지 아홉살때부터 학교가는 것보다 소리학원 문간
에서 소리도둑질하는 것이 그렇게 좋았어요"
46년7월21일 전북 정읍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은씨는 국민학교를
다니기 위해 광주친척집에서 자랐다. 대성국교 2학년 때부터 열다섯살이
될 때까지 광주민족예술학원에서 오천수명창에게 판소리 다섯마당을
배웠다.
열다섯살때는 박봉술명창에게서 "적벽가"를 배웠다. 열아홉살때 양아버지
로 모시던 오명창이 작고하자 순회국악단체생활을 시작한다. 27세때는
충효민속국극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그가 판소리계에 알려진 것은 70년. 정읍에 내려온 국립창극단의 공연을
보러갔다가 회식장소에서 누가 그에게 소리를 시킨 것이다. 당시
"대선생님들 앞에서 외람되나마 한번 해보겠습니다"하곤 긴장해 소리를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당시 국립창극단장이던 박동진선생이 제소리를 마음에 들어했지요.
나중에 서울오면 꼭 들르라고 말씀하셨죠. 지방순회공연을 계속하다
76년에야 상경할 수 있었어요"
상경해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그는 성우향 조상현 오정숙명창등을 찾아
다니며 명창들의 장기를 전수받았다. 이후 은씨는 국립창극단의 간판스타
로서 서편제 동편제를 아우르는 판소리창자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서편제 동편제 나누어 보지만 기본은 애조입니다. 애조가 좀더 많은
것이 서편제, 적은 것이 동편제입니다"
은씨는 오정숙선생 문하에서 동초제 판소리를 익혀 올해 전수조교가
됐다. 동초제는 남성적이고 사설치레가 많은 것이 특징.
77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했고 88년 전주대사습
명창부분 대통령상을 받았다. 86년부터 3년간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완창발표회도 가졌다.
일년 열두달 공연과 연습으로 하루도 판소리와 떨어져 살지 않지만 그는
항상 심심산골을 찾아다니던 국극단시절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18세때였습니다. 남원부근마을에서 창극을 했습니다. "춘향가"중 어사
출도대목을 부르고 있는데 객석에서 누군가 "돈꽃핀다 돈꽃이 핀다"노래를
해요. 자세히 보니 청중들이 저마다 백환짜리 지폐를 들고 흔들고
있더군요. 나중에 그돈을 거두어보니 무려 8만원, 1년을 놀면서 쓸수있는
거금이었죠"
지금도 마을 평상 8개를 빌려 붙인 위에 멍석을 깐 가설무대를 그리워
한다. 한때 남원에 2층짜리 집을 지었다가 6개월장마로 공연을 못해
되팔아 빚을 갚은 아픈 기억도 같이 떠오른다.
"예전에는 손님대부분이 영감 할머니들이었지요. 추임새도 좋았고 춤도
잘추고 시끌벅적 했죠. "귀명창"들이 많았어요. 요사이는 제가 속한
단체가 국립이란 타이틀이 붙어서인지 하이칼라관객들이 많아요. 너무
점잖다는 생각이지요"
손님들이 앉아서 박수만 쳐주는 요즘보다 소리를 잠시 엉터리로
부를라치면 "못쓰것다 내려가거라"는 야유를 외쳐주던 그때가 좋았다고.
"현재 남자7명을 제자로 기르고 있어요. 나보다 잘하는 제자가 나와 빨리
뒤를 이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지요" 6월 5일에는 국립국악원에서
열리는 "일요명인명창전"무대에 선다.
동초제"수궁가"를 들려주고 2부에서는 스승 오정숙명창과 부인 이순단씨
와 함께 "춘향가"중 "어사와 나무꾼"대목을 공연할 계획.
20살때만나 21살때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2남2녀. 부인도
서라벌여성국극단 고려여성국극단에 관계하며 국악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권영설기자>
"명창이 되려면 논두렁정기라도 타고나야 한다"고도 한다. 명창의 길에는
이처럼 산도 많고 골도 깊다.
판소리를 배우려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명창에 뜻을 두고 일로매진하는
이들은 오히려 줄어들었다는게 원로들의 지적이다. 특히 여자소리꾼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데 반해 남자소리꾼들은 차츰 줄어들어 우려를 낳고
있다.
"역사에 남은 명창들은 가정을 버리면서 소리에 매달렸죠. 가족중심세태가
확산돼 부양이 우선인 풍토라 남자소리꾼들이 줄고 있어요"
국립창극단의 중견소리꾼 은희진씨(48)는 쉰이 다된 그가 아직도 주요
공연에서 이도령 심봉사 흥보 등 주요배역을 도맡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은씨보다 10년 아래의 여성후배들이 이미 주역을 더 젊은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조역 단역으로 지도.후원에 전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작정 소리가 좋아서 시작했지요. 득음의 목표를 정하고는 흔들림이
없었죠. 요즘엔 열정들이 없는 것 같아요"
은씨는 동초 김연수명창(1907~71)에게서 시작된 동초제판소리의 맥을
잇고 있는 소리꾼이다. 판소리창자 중 서편제 동편제를 가리지 않고 좋은
더늠을 찾아 판소리 모든 유파를 섭렵해온 묘한 경력의 소유자.
"천직이 되려고 그랬는지 아홉살때부터 학교가는 것보다 소리학원 문간
에서 소리도둑질하는 것이 그렇게 좋았어요"
46년7월21일 전북 정읍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은씨는 국민학교를
다니기 위해 광주친척집에서 자랐다. 대성국교 2학년 때부터 열다섯살이
될 때까지 광주민족예술학원에서 오천수명창에게 판소리 다섯마당을
배웠다.
열다섯살때는 박봉술명창에게서 "적벽가"를 배웠다. 열아홉살때 양아버지
로 모시던 오명창이 작고하자 순회국악단체생활을 시작한다. 27세때는
충효민속국극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그가 판소리계에 알려진 것은 70년. 정읍에 내려온 국립창극단의 공연을
보러갔다가 회식장소에서 누가 그에게 소리를 시킨 것이다. 당시
"대선생님들 앞에서 외람되나마 한번 해보겠습니다"하곤 긴장해 소리를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당시 국립창극단장이던 박동진선생이 제소리를 마음에 들어했지요.
나중에 서울오면 꼭 들르라고 말씀하셨죠. 지방순회공연을 계속하다
76년에야 상경할 수 있었어요"
상경해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그는 성우향 조상현 오정숙명창등을 찾아
다니며 명창들의 장기를 전수받았다. 이후 은씨는 국립창극단의 간판스타
로서 서편제 동편제를 아우르는 판소리창자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서편제 동편제 나누어 보지만 기본은 애조입니다. 애조가 좀더 많은
것이 서편제, 적은 것이 동편제입니다"
은씨는 오정숙선생 문하에서 동초제 판소리를 익혀 올해 전수조교가
됐다. 동초제는 남성적이고 사설치레가 많은 것이 특징.
77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했고 88년 전주대사습
명창부분 대통령상을 받았다. 86년부터 3년간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완창발표회도 가졌다.
일년 열두달 공연과 연습으로 하루도 판소리와 떨어져 살지 않지만 그는
항상 심심산골을 찾아다니던 국극단시절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18세때였습니다. 남원부근마을에서 창극을 했습니다. "춘향가"중 어사
출도대목을 부르고 있는데 객석에서 누군가 "돈꽃핀다 돈꽃이 핀다"노래를
해요. 자세히 보니 청중들이 저마다 백환짜리 지폐를 들고 흔들고
있더군요. 나중에 그돈을 거두어보니 무려 8만원, 1년을 놀면서 쓸수있는
거금이었죠"
지금도 마을 평상 8개를 빌려 붙인 위에 멍석을 깐 가설무대를 그리워
한다. 한때 남원에 2층짜리 집을 지었다가 6개월장마로 공연을 못해
되팔아 빚을 갚은 아픈 기억도 같이 떠오른다.
"예전에는 손님대부분이 영감 할머니들이었지요. 추임새도 좋았고 춤도
잘추고 시끌벅적 했죠. "귀명창"들이 많았어요. 요사이는 제가 속한
단체가 국립이란 타이틀이 붙어서인지 하이칼라관객들이 많아요. 너무
점잖다는 생각이지요"
손님들이 앉아서 박수만 쳐주는 요즘보다 소리를 잠시 엉터리로
부를라치면 "못쓰것다 내려가거라"는 야유를 외쳐주던 그때가 좋았다고.
"현재 남자7명을 제자로 기르고 있어요. 나보다 잘하는 제자가 나와 빨리
뒤를 이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지요" 6월 5일에는 국립국악원에서
열리는 "일요명인명창전"무대에 선다.
동초제"수궁가"를 들려주고 2부에서는 스승 오정숙명창과 부인 이순단씨
와 함께 "춘향가"중 "어사와 나무꾼"대목을 공연할 계획.
20살때만나 21살때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2남2녀. 부인도
서라벌여성국극단 고려여성국극단에 관계하며 국악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권영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