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 박흥식 전화신그룹회장의 일생은 국내
기업부침사의 "축소판"을 보는듯 하다.

평남 용강의 2천석군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박회장는 15세때 고향에서
미곡상과 인쇄소를 차려 운영하다 서울로 올라와 28세때인 1931년 당시
귀금속상회인 화신상회를 인수, 유통사업에 손을 대면서 사업가로 성공
하여 한때 "한국 제1의 부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해방이후에는 친일파로 몰려 반민특위에 회부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후 한국 최초의 무역회사인 화신산업을 차려 6.25전쟁 특수로 큰돈을
벌어 신신백화점을 개관하는등 사업을 다시일으켰다. 그러나 5.16
군사정부의 권유에 따라 62년5월 흥한화학을 설립하면서 그의 쇠락은
시작되었다.

내자 41억원과 외자 1천50만달러로 건설된 동양 최대(당시)규모의 이
비스코스 인견사공장은 외자조달 부진과 전력난등으로 준공이 2년 이상
늦어진데다 때마침 불어닥친 불경기에 못이겨 제대로 가동도 못해보고
69년 산업은행에 넘어갔다.

그후 화신전자 (72년)와 화신소니(73년)를 설립, 재기를 노렸으나 지난
80년10월 3백억원의 부도를 내고 화신그룹은 마침내 도산하고 말았다.

박회장이 사업을 일으켜 도산하기까지의 기간은 만60년. "사업가는
일하기 위해서 태어난다"는 말이 무색할정도로 도산한 이후 그에게
몰아닥친 시련은 가혹했다.

담석증과 파킨스씨병으로 투병생활을 계속해야했고 생활비마련을 위해
줄곧 살아오던 서울종로구 가회동177의1 저택(대지 9백평 건평 1백20평)
을 팔아야만 했다.

최근 본사의 인터뷰 요청에 대해서 박회장은 가족들을 통해 "여생을
조용하게 살고 싶다"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사회와 단절하면서 투병생활을 해왔다.

그는 집이나 병원에 누워서도 벽에 잔여 재산목록과 중단한 사업설계
도면을 걸어놓고 있을 정도로 사업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고 유족들은
전했다.

"한국 제1의 부자"명성을 날렸던 옛영광을 재현시키지는 못했으나 그의
열성은 후배사업가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한편 박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 영안실은 운명소식이 알려지지
않은데다 도산한 이후 은둔생활을 해온 탓인지 이홍구부총리 김기배
민자당의원 등 1백여명의 조문객만이 다녀갔을뿐 쓸쓸한 분위기였다.

유족으로는 장남 병석씨(흥한학원 이사장)와 차남 병찬씨(개인사업)
5녀가 있다.

<김영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