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170) KAL기 무르만스크 불시착..조중훈 (32)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항공사 경영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을 꼽는다면 "안전과 서비스"
이다. 특히 안전은 인명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점에서 어느 무엇과도 견줄수
없는 기본적인 전제가 아닐수 없다.
때문에 안전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한 항공사의 노력은 1년365일, 하루
한시도 멈춤이 있을수 없다. 정비사들은 한여름 땡볕에 달구어진 항공기와
활주로의 열기를 받아 구슬땀에 범범이 되기도 하고 한겨울의 삭풍이 무릅
쓰기도 한다. 조종사들도 마찬가지다. 번갈아가며 정해진 계획에 따라 첨단
훈련장비를 통해 쉼없는 훈련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오토바이를 직접
몰며 현장을 찾았던 민항초기 이래 지금까지도 수시로 공항을 둘러보는 것
도 바로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예상할수도 상상할수도 없는
비극적인 사고로 인해 이세상의 질서와 인간 사회 바로 그 자체에 허망함을
느끼게도 하는 것이 항공사업이다. 안전사고로 이어질수밖에 없는 중대한
결함이나 과실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일 때는 자업자득이라며 경영자로서의
회한을 달랠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윤을 거역하는 만행이 덧보태져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빚어질
때는 경영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항공운송 사업 자체에 회의를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냉전시대에 겪어야만 했던 아픔들이 바로 이런
사건들이다.
그것은 국제정치의 비정함과 우리나라의 지정학적인 위치 그리고 남북
분단의 비극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1978년 4월에 빚어진 소련
무르만스크 불시착, 83년의 007 피격 사건, 87년 북한이 사주한 테러사건들
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정열과 집념을 갖고 활동한 지난 반백년 동안
이들 사고가 나에게 가장 참기 힘든 충격을 안겨 주었고 사업에 대해 강한
회의를 느끼게 했던 일들이다.
이 글을 통해 불의의 항공사고로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다시 한번 사과
드리며 아무쪼록 화해와 평화무드가 지속되어 냉전상황에서 빚어질수 있는
그같은 만행에 의한 희생이 다시 없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무르만스크 불시착 사건 발생일인 78년 4월21일, 나는 출장중인 일본에서
사고 첫 소식을 들었다. B707기가 프랑스 오를리공항을 이륙했는데 앵커리지
도착 전에 행방이 묘연하다는 긴급 보고를 받았다. 불길한 예감에서 나는
언제든지 구원차 출동할수 있도록 비행기 1대를 서울에 비상대기시켜
놓으라고 지시하고 즉시 귀국길에 올랐다. 서울행항공기에서는 아예 조정실
에 탑승하여 707기의 행방을 계속 추적하며 신속하게 보고를 받았다.
조정실의 라디오 통신을 통해 사고기가 소련 영토에 불시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안도의 숨을 쉬었다. 승객들이 무사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였다.
서울에 도착한 나는 즉시 구조반을 편서하여 소련영토에서 가까운 핀란드의
헬싱키로 날아가 승객과 승무원및 기체를 인수할 채비를 갖추었다. 직접
소련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미수교 공산 종주국이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헬싱키를 생각해낸 것은 머릿속에 지구 전체를 담아 놓고 항공기운항
루트의 특징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핀란드의 지정학적인 여건과
소련및 자유세계와의 관계 등도 고려했던 것이었다. 승객 송환 문제가 거론
도 되기전에 특별기를 띄운 것은 소련측에 승객들을 빨리 송환하겠다는
무언의 압력 가하기 위한 의도에서 였다.
내가 인솔한 구호반이 탑승한 특별기는 시간이 촉박하여 김포공항이륙
당시까지도 핀란드 정부의 착륙 허가를 받지 못했었다. 외무부를 통해
현지 대사까지 나서서 노력한 끝에 중간 기착지인 애커리지에 도착했을때
허가 전문을 받아 볼수 있었다.
정부는 소연 주재 미대사관을 통해 소련 외무성에 인도적 차원에서 탑승객
과 기체를 즉시 송환해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소연당국은 대외이미지
와 세계여론을 의식하여 탑승객을 송환키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팬암
항공사 소속 B727기가 소련에 들어가 무르만스크에서 기장과 항법사를 제외
한 승객들을 싣고 헬싱키로 돌아올수 있었다.
이와관련 고 박대통령은 "승객과 승무원들을 지체없이 송환해 준 소련
당국의 호의적 배려와 조처에 감사를 표한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은 당시 양국간의 관계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으로 사고 발생 10일만에 기장및 항법사도 송환되어 무르만스크 불시착
사고는 마무리되었다.
이다. 특히 안전은 인명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점에서 어느 무엇과도 견줄수
없는 기본적인 전제가 아닐수 없다.
때문에 안전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한 항공사의 노력은 1년365일, 하루
한시도 멈춤이 있을수 없다. 정비사들은 한여름 땡볕에 달구어진 항공기와
활주로의 열기를 받아 구슬땀에 범범이 되기도 하고 한겨울의 삭풍이 무릅
쓰기도 한다. 조종사들도 마찬가지다. 번갈아가며 정해진 계획에 따라 첨단
훈련장비를 통해 쉼없는 훈련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오토바이를 직접
몰며 현장을 찾았던 민항초기 이래 지금까지도 수시로 공항을 둘러보는 것
도 바로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예상할수도 상상할수도 없는
비극적인 사고로 인해 이세상의 질서와 인간 사회 바로 그 자체에 허망함을
느끼게도 하는 것이 항공사업이다. 안전사고로 이어질수밖에 없는 중대한
결함이나 과실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일 때는 자업자득이라며 경영자로서의
회한을 달랠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윤을 거역하는 만행이 덧보태져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빚어질
때는 경영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항공운송 사업 자체에 회의를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냉전시대에 겪어야만 했던 아픔들이 바로 이런
사건들이다.
그것은 국제정치의 비정함과 우리나라의 지정학적인 위치 그리고 남북
분단의 비극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1978년 4월에 빚어진 소련
무르만스크 불시착, 83년의 007 피격 사건, 87년 북한이 사주한 테러사건들
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정열과 집념을 갖고 활동한 지난 반백년 동안
이들 사고가 나에게 가장 참기 힘든 충격을 안겨 주었고 사업에 대해 강한
회의를 느끼게 했던 일들이다.
이 글을 통해 불의의 항공사고로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다시 한번 사과
드리며 아무쪼록 화해와 평화무드가 지속되어 냉전상황에서 빚어질수 있는
그같은 만행에 의한 희생이 다시 없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무르만스크 불시착 사건 발생일인 78년 4월21일, 나는 출장중인 일본에서
사고 첫 소식을 들었다. B707기가 프랑스 오를리공항을 이륙했는데 앵커리지
도착 전에 행방이 묘연하다는 긴급 보고를 받았다. 불길한 예감에서 나는
언제든지 구원차 출동할수 있도록 비행기 1대를 서울에 비상대기시켜
놓으라고 지시하고 즉시 귀국길에 올랐다. 서울행항공기에서는 아예 조정실
에 탑승하여 707기의 행방을 계속 추적하며 신속하게 보고를 받았다.
조정실의 라디오 통신을 통해 사고기가 소련 영토에 불시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안도의 숨을 쉬었다. 승객들이 무사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였다.
서울에 도착한 나는 즉시 구조반을 편서하여 소련영토에서 가까운 핀란드의
헬싱키로 날아가 승객과 승무원및 기체를 인수할 채비를 갖추었다. 직접
소련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미수교 공산 종주국이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헬싱키를 생각해낸 것은 머릿속에 지구 전체를 담아 놓고 항공기운항
루트의 특징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핀란드의 지정학적인 여건과
소련및 자유세계와의 관계 등도 고려했던 것이었다. 승객 송환 문제가 거론
도 되기전에 특별기를 띄운 것은 소련측에 승객들을 빨리 송환하겠다는
무언의 압력 가하기 위한 의도에서 였다.
내가 인솔한 구호반이 탑승한 특별기는 시간이 촉박하여 김포공항이륙
당시까지도 핀란드 정부의 착륙 허가를 받지 못했었다. 외무부를 통해
현지 대사까지 나서서 노력한 끝에 중간 기착지인 애커리지에 도착했을때
허가 전문을 받아 볼수 있었다.
정부는 소연 주재 미대사관을 통해 소련 외무성에 인도적 차원에서 탑승객
과 기체를 즉시 송환해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소연당국은 대외이미지
와 세계여론을 의식하여 탑승객을 송환키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팬암
항공사 소속 B727기가 소련에 들어가 무르만스크에서 기장과 항법사를 제외
한 승객들을 싣고 헬싱키로 돌아올수 있었다.
이와관련 고 박대통령은 "승객과 승무원들을 지체없이 송환해 준 소련
당국의 호의적 배려와 조처에 감사를 표한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은 당시 양국간의 관계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으로 사고 발생 10일만에 기장및 항법사도 송환되어 무르만스크 불시착
사고는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