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창] (3) 가야금병창 강정숙씨..유려한 연주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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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수 나온다 얼굴은 형산에 백옥이요 눈은 소상에 물결같이 잉어허리
곰의팔에 팔척신장 세지갑옷에 황금투구 망망조대를 눌러쓰고 뱃머리 우뚝
크게외여 하는말 상산의 조자룡을 아는다 모른다"
가야금병창의 강정숙씨(42.국립국악원지도위원)가 즐겨부르는 "적벽가"중
"자룡이 활쏘는 대목"이다. 가야금병창 "적벽가"는 그의 유려한 연주와
경쾌한 음색으로 항상 박진감이 넘친다.
10세때 국악에 입문,가야금뿐 아니라 판소리 창극 남도민요 등 국악의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드는 강씨에게는 "만능 탤런트"란 별명이 항상 붙어
다닌다.
박귀희선생(1921~93)의 가야금병창과 서공철선생(1911~82)의 가야금산조의
맥을 이어 92년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및 병창보유자 후보"
로 지정됐다.
"국민학교 3학년때로 기억합니다. 작은 판자가 붙어있는 고물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지요.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들었는데 너무 아름다웠
습니다. 저런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일을 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소리가 나중에 알고 보니 가야금소리였다.
52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강씨는 국민학교 4학년때 전북 남원으로
이사하게 된다. 어려워진 가정 형편 탓이었다.
그 때부터 인간문화재 강도근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이후 그의
국악인생은 좋은 선생들을 만나는 행운의 연속이었다. 75년에
국립창극단의 막내로 입단했는데 거기서 박동진 박초월 김소희 박귀희
한능선 선생들의 소리를 배울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열살때 자신을 매료시킨 가야금을 떠나지 못했다.
72년 이후 박귀희선생에게서 가야금병창을,73년 이후 서공철선생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50년대 이후 쇠퇴일로에 있는 가야금병창을 살려 그 명맥을 유지하고
부흥시켰던 가야금병창의 대모 박선생은 연습에 엄했지만 열성적인
향학열을 보이는 강씨를 특히 아꼈다. 젊은 나이라고 고사했으나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지 강씨를 92년 보유자후보로 기어코 지정해놓고 갔다.
"박선생이 돌아가신 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는 강씨는 지난해
11월28일 독주회를 가질 때 항상 독주회때면 맨앞자리에 앉아
계신것만으로도 힘이 됐던 선생이 그리워 목이메었다고 눈물짓는다.
서공철선생도 강씨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주었던 스승이다.
강씨는 21살때 그 문하에 들어가 한숙구(1850~1925)제 서공철류가야금산조
를 배웠다. 서공철류 산조는 고박하고 장중한 것이 특징으로서 특히 즉흥성
이 강하다. 남성적인 특징에 더해 사계절이 분명하게 표현돼 있는것이 매력
이다. 강씨는 서선생의 성품자체가 맺고 끝는게 분명해 그 가락 또한 그런
매력이 있는것 같다고 회고한다.
"약속시간에 어김이 없는 분이었지요. 30분전에 부근에 나타나 이리저리
소요하다가 약속시간이 되면 정확히 그 자리에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아무리 천하없는 높은 분과 만날 약속이라도 30분동안 상대방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소리 없이 일어나 나가셨습니다" 강씨는 서선생이 그 꼿꼿한
성격 탓에 제자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고 문화재지정도 받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서공철류산조의 맥을 잇고 제자를 기르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고 있다.
90년에 "한숙구제 서공철류 가야금산조 악보집"을 출간했고 80년 이후
"가야금병창독집" "판소리 가야금산조및 병창독집" "가야금산조집-한숙구제
서공철류"등 10여종의 음반을 출반했다. 지금도 하루 5시간은 연습하고
9시간 연습하는 경우도 잦다. 개인공부를 위해 올해는 강의스케줄도
없애버렸다.
"국악의해가 그동안 음지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국악인들이 자신의
평생공부를 펼쳐보일 장이 마련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게 강씨의
소망이다.
정책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국악의 대중화에는 국악향수기회의 확대가
중요하다고 강씨는 생각하고 있다.
양악과 달리 "한 장단만 배우고 한 마루만 불러도 좋아"지기 때문이다.
84세 74세의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안양에서 살고 있다. 바빠서
미뤄둔 결혼을 이제는 하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권녕설기자>
곰의팔에 팔척신장 세지갑옷에 황금투구 망망조대를 눌러쓰고 뱃머리 우뚝
크게외여 하는말 상산의 조자룡을 아는다 모른다"
가야금병창의 강정숙씨(42.국립국악원지도위원)가 즐겨부르는 "적벽가"중
"자룡이 활쏘는 대목"이다. 가야금병창 "적벽가"는 그의 유려한 연주와
경쾌한 음색으로 항상 박진감이 넘친다.
10세때 국악에 입문,가야금뿐 아니라 판소리 창극 남도민요 등 국악의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드는 강씨에게는 "만능 탤런트"란 별명이 항상 붙어
다닌다.
박귀희선생(1921~93)의 가야금병창과 서공철선생(1911~82)의 가야금산조의
맥을 이어 92년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및 병창보유자 후보"
로 지정됐다.
"국민학교 3학년때로 기억합니다. 작은 판자가 붙어있는 고물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지요.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들었는데 너무 아름다웠
습니다. 저런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일을 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소리가 나중에 알고 보니 가야금소리였다.
52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강씨는 국민학교 4학년때 전북 남원으로
이사하게 된다. 어려워진 가정 형편 탓이었다.
그 때부터 인간문화재 강도근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이후 그의
국악인생은 좋은 선생들을 만나는 행운의 연속이었다. 75년에
국립창극단의 막내로 입단했는데 거기서 박동진 박초월 김소희 박귀희
한능선 선생들의 소리를 배울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열살때 자신을 매료시킨 가야금을 떠나지 못했다.
72년 이후 박귀희선생에게서 가야금병창을,73년 이후 서공철선생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50년대 이후 쇠퇴일로에 있는 가야금병창을 살려 그 명맥을 유지하고
부흥시켰던 가야금병창의 대모 박선생은 연습에 엄했지만 열성적인
향학열을 보이는 강씨를 특히 아꼈다. 젊은 나이라고 고사했으나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지 강씨를 92년 보유자후보로 기어코 지정해놓고 갔다.
"박선생이 돌아가신 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는 강씨는 지난해
11월28일 독주회를 가질 때 항상 독주회때면 맨앞자리에 앉아
계신것만으로도 힘이 됐던 선생이 그리워 목이메었다고 눈물짓는다.
서공철선생도 강씨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주었던 스승이다.
강씨는 21살때 그 문하에 들어가 한숙구(1850~1925)제 서공철류가야금산조
를 배웠다. 서공철류 산조는 고박하고 장중한 것이 특징으로서 특히 즉흥성
이 강하다. 남성적인 특징에 더해 사계절이 분명하게 표현돼 있는것이 매력
이다. 강씨는 서선생의 성품자체가 맺고 끝는게 분명해 그 가락 또한 그런
매력이 있는것 같다고 회고한다.
"약속시간에 어김이 없는 분이었지요. 30분전에 부근에 나타나 이리저리
소요하다가 약속시간이 되면 정확히 그 자리에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아무리 천하없는 높은 분과 만날 약속이라도 30분동안 상대방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소리 없이 일어나 나가셨습니다" 강씨는 서선생이 그 꼿꼿한
성격 탓에 제자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고 문화재지정도 받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서공철류산조의 맥을 잇고 제자를 기르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고 있다.
90년에 "한숙구제 서공철류 가야금산조 악보집"을 출간했고 80년 이후
"가야금병창독집" "판소리 가야금산조및 병창독집" "가야금산조집-한숙구제
서공철류"등 10여종의 음반을 출반했다. 지금도 하루 5시간은 연습하고
9시간 연습하는 경우도 잦다. 개인공부를 위해 올해는 강의스케줄도
없애버렸다.
"국악의해가 그동안 음지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국악인들이 자신의
평생공부를 펼쳐보일 장이 마련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게 강씨의
소망이다.
정책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국악의 대중화에는 국악향수기회의 확대가
중요하다고 강씨는 생각하고 있다.
양악과 달리 "한 장단만 배우고 한 마루만 불러도 좋아"지기 때문이다.
84세 74세의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안양에서 살고 있다. 바빠서
미뤄둔 결혼을 이제는 하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권녕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