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113) 박성상 <전 한국은행 총재>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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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1월 나는 조사1부장에 정식 임명됐다. 조사부로 발령받은후 11년동안
조사1부장이 되는게 나의 꿈이었다. 많은 인재들이 포진하고 있는 한국
은행조사부내에서 내가 조사부장 자리를 넘본다는 것은 "오르지 못할 나무"
였지만 항상 꿈만은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 그꿈이 실현된 것이다. 은행안에서는 경이적인 눈길과 축복을 동시에
받았고 나의 인생에선 하나의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때의 감격과 기쁨은 아직도 잊을수 없다. 나는 한국은행조사1부장의
역할은 우리경제의 문제점을 점검,TV영상이 흐려지면 이를 조정하듯이
적절한 정책을 연구해 정부에 건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국민경제는 잘 성장하다가도 도중에 기울어지기도 하고 비틀
거리기도 하며 대내외 정세변화에 멍들기도한다. 경제는 마치 사람의
몸과 같아서 조절을 잘하지 못하면 병이든다.
국민경제의 복잡다기함은 인체구조와 같아 병이나면 그 근본원인을 진단
하기가 어려워 오진하기 쉽다.
나라경제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병세가 나타나자마자 정부가 갖고있는
막강한 정책조정 권한인 산업정책 통화정책 환율정책 금리정책 그리고
융자정책등을 총동원,처방과 투약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당시 나는 우리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통화의 과대공급과 고평가에 있다고
진단했다.
왜냐하면 통화량이 연30%이상 증가하다가 67년에는 42.5%까지 과대공급
됨에 따라 물가가 10~20%수준으로 폭등했다. 뿐만아니라 통화량의 과대팽창
으로 실물생산소득증가율보다 자산소득증가율이 월등히 높아 과소비가 조장
돼 수입이 급격히 증가했다.
실제로 67년엔 수출이 3억2천만달러,수입은 10억달러로 무역수지적자가
수출액의 2배가 넘는 6억8천만달러에 달했다. 다음해인 68년엔 무역수지
적자규모가 10억달러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환율은 64년5월3일 달러당 2백55원으로 인상조정된후 67년말에는 이보다
6.7%절하된 2백72원이었다.
연평균 10%이상의 물가상승률에 비추어보면 비현실적으로 고평가 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평가된 환율이 수출을 어렵게하고 수입을 촉진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수출은 과거 정부의 갖가지 수출촉진정책에 힘입어 연평균 45%의 신장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67년에는 수출증가율이 28%로 신장세가 둔화되었다.
그래서 수출기업은 노임과 원자재값이 급등,수출품 생산비가 올라 "출혈
수출"을 하고있으니 환율을 현실화,즉 평가절하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차관도입으로 공장을 일으킨 내수업체는 환율절하는 차관상환의
부담을 높여 제품값을 끌어 올릴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환율현실화를
극구 반대했다.
정부는 환율을 인상하면 수입원자재값이 올라 그렇지않아도 연 10%이상의
물가고에 시달리는 경제에 큰 부담을 줄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당시 박충훈
부총리는 환율은 생산적으로 운영하되 출혈수출은 그것대로 간접지원
하겠다고 여러차례 천명했다.
나는 당시 내가 신임하는 안상국 일반경제과장과 박승 조사역(건설부장관
역임)성준경 행원(한미은행 전무 역임)등과 같이 "적정통화량공급과 환율
현실화"를 위한 대정부건의안을 만들었다.
그간 한국은행에서는 67년 김세동 총재가 임기만료로 퇴임하시고 김성환
이사가 은행감독원장으로 영전했다. 김총재후임으로 서진수총재가 취임해
내가 만든 대정부건의안은 서총재앞으로 보고됐다.
서총재는 이 건의안을 서봉균 재무장관에게 브리핑하기로하고 그를 한국
은행으로 초청,3월7일에 서장관이 한국은행을 방문하기로 돼있었다.
조사1부장이 되는게 나의 꿈이었다. 많은 인재들이 포진하고 있는 한국
은행조사부내에서 내가 조사부장 자리를 넘본다는 것은 "오르지 못할 나무"
였지만 항상 꿈만은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 그꿈이 실현된 것이다. 은행안에서는 경이적인 눈길과 축복을 동시에
받았고 나의 인생에선 하나의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때의 감격과 기쁨은 아직도 잊을수 없다. 나는 한국은행조사1부장의
역할은 우리경제의 문제점을 점검,TV영상이 흐려지면 이를 조정하듯이
적절한 정책을 연구해 정부에 건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국민경제는 잘 성장하다가도 도중에 기울어지기도 하고 비틀
거리기도 하며 대내외 정세변화에 멍들기도한다. 경제는 마치 사람의
몸과 같아서 조절을 잘하지 못하면 병이든다.
국민경제의 복잡다기함은 인체구조와 같아 병이나면 그 근본원인을 진단
하기가 어려워 오진하기 쉽다.
나라경제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병세가 나타나자마자 정부가 갖고있는
막강한 정책조정 권한인 산업정책 통화정책 환율정책 금리정책 그리고
융자정책등을 총동원,처방과 투약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당시 나는 우리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통화의 과대공급과 고평가에 있다고
진단했다.
왜냐하면 통화량이 연30%이상 증가하다가 67년에는 42.5%까지 과대공급
됨에 따라 물가가 10~20%수준으로 폭등했다. 뿐만아니라 통화량의 과대팽창
으로 실물생산소득증가율보다 자산소득증가율이 월등히 높아 과소비가 조장
돼 수입이 급격히 증가했다.
실제로 67년엔 수출이 3억2천만달러,수입은 10억달러로 무역수지적자가
수출액의 2배가 넘는 6억8천만달러에 달했다. 다음해인 68년엔 무역수지
적자규모가 10억달러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환율은 64년5월3일 달러당 2백55원으로 인상조정된후 67년말에는 이보다
6.7%절하된 2백72원이었다.
연평균 10%이상의 물가상승률에 비추어보면 비현실적으로 고평가 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평가된 환율이 수출을 어렵게하고 수입을 촉진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수출은 과거 정부의 갖가지 수출촉진정책에 힘입어 연평균 45%의 신장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67년에는 수출증가율이 28%로 신장세가 둔화되었다.
그래서 수출기업은 노임과 원자재값이 급등,수출품 생산비가 올라 "출혈
수출"을 하고있으니 환율을 현실화,즉 평가절하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차관도입으로 공장을 일으킨 내수업체는 환율절하는 차관상환의
부담을 높여 제품값을 끌어 올릴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환율현실화를
극구 반대했다.
정부는 환율을 인상하면 수입원자재값이 올라 그렇지않아도 연 10%이상의
물가고에 시달리는 경제에 큰 부담을 줄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당시 박충훈
부총리는 환율은 생산적으로 운영하되 출혈수출은 그것대로 간접지원
하겠다고 여러차례 천명했다.
나는 당시 내가 신임하는 안상국 일반경제과장과 박승 조사역(건설부장관
역임)성준경 행원(한미은행 전무 역임)등과 같이 "적정통화량공급과 환율
현실화"를 위한 대정부건의안을 만들었다.
그간 한국은행에서는 67년 김세동 총재가 임기만료로 퇴임하시고 김성환
이사가 은행감독원장으로 영전했다. 김총재후임으로 서진수총재가 취임해
내가 만든 대정부건의안은 서총재앞으로 보고됐다.
서총재는 이 건의안을 서봉균 재무장관에게 브리핑하기로하고 그를 한국
은행으로 초청,3월7일에 서장관이 한국은행을 방문하기로 돼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