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설악프라자CC에서는 "일동수퍼시리즈골프대회"가 개최됐다.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일동수퍼시리즈가 어떤연유의 대회인지
궁금하게 생각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대회는 왕년의 명프로 김승학씨(47.성산개발 대표)가
개최하는 대회이다. 이 대회는 50세 이상의 시니어부경기가 핵심을 이루고
그외 당해연도 프로 아마의 각종대회우승자들이 모여 기량을 점검하는
대회이다. 이 대회는 개최비용이 연간 1억2천만원정도 들어가는데 그 전부
가 김승학씨의 사업체에서 부담한다. 대회자체에서 특별한 "프로모션" 의
의도를 찾기 힘들고 특히 대외적으로 생색날일이 없는 시니어부 개최는
언뜻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대회를 이해하려면 김승학을 이해해야 한다. 또 김승학을 이해하려면
그의 골프와 사업가로서의 변신,그리고 그의 집념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부터 그얘기를 해보자.

>>그의 골프<<

프로골퍼로서 그의 이력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럿 붙어있다. 그는
지난 73년 한국프로로서는 최초로 아시아서키트외국대회(필리핀오픈)에서
우승했고 그해 한국선수로서 최초로 전영오픈에 출전했었다.

그가 78년 아시아서키트 한국대회(남서울CC)에서 우승할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대회도중 맹장염에 걸렸다. 그러나 우승을 눈앞에 두고 경기를 포기
할수는 없었다. 그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결국 우승했고 시상식직후
병원으로 급송됐다. 그는 맹장이 터져 버렸고 그후 3개월이나 입원해야
했다.

그 대가는 엄청났다. 가뜩이나 허리가 안좋았던 그는 그때의 무리와 3개월
간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바람에 허리디스크를 얻어 사실상 선수생활을
끝내야 했다.

나이 32세에 총9승의 마감이었다.

>>변신<<

그는 선수생활중 돈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그는 당시 한장상프로와 함께
일본프로대회를 돌았는데 그때의 고생이 뼈속 깊이 남았다. 그는 일본에서
한손엔 골프백을,한손엔 트렁크를 들고 지하철을 타고 대회를 찾아 다녔다.
손의 감각유지를 위해 물주전자도 안드는 요즘 프로들로서는 상상키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 외국대회에서 1,2라운드때 잘 치다가도 3,4라운드때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잘먹어야 하는 필요성도 절감했다.

그때 김승학은 가슴깊이 결심한것들이 있었다. "후배들 한테는 결코 이런
고생을 물려주지 않겠다""후배들이 마음껏 연습할수 있는 골프장을 하나
만들겠다""프로들이 진정한 경기를 펼칠수 있는 대회를 만들겠다"
그의 이같은 꿈들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다. 돈버는
것을 하나의 사명으로 느낀 그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허리디스크로
그시점은 크게 앞당겨졌다.

아는 것은 골프 뿐이었기때문에 그는 골프채 수입상(석교상사)을 차렸고
소매점(그린골프프라자)도 개설했다. 또 골프를 제대로 알릴 매스컴도
절실하다고 생각,국제골프(잡지)도 창간했다. 이모두가 7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꿈과 현실<<

그는 웬만큼 사업에 성공했다. 세상물정 모르는 프로로서는 믿기힘들
정도의 대전환이었다.

그는 지난 89년 평생의 꿈인 골프장 건설을 시작했다. 바로"일동레이크GC"
이다. 그는 그의 골프인생에서 느꼈던 모든 것을 일동레이크GC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는 "골프를 아는 사람이 만드는 코스,골프의 전부가 테스트
되는 코스,골퍼가 골프만을 느끼며 플레이 할수있는 코스"를 추구했다.

예를들어 티잉그라운드만 해도 한홀에 무려 5개씩 만들었다. 골퍼 각자의
기량에 맞게 티잉그라운드를 선택하라는 것이고 한 겨울이라도 고무매트를
사용하는 "비골프적 상황"을 배제키 위한 것이었다. 일동레이크GC는 또
18홀중 9개홀이 연못을 끼고 있다.

연못의 총 면적만 3만평규모로 운으로 인한 스코어메이킹은 생각지도
못하게 했다.

골프장 건설의 어려움은 최악이라는 요즘 상황을 감안할때 미루어
짐작할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같은 고비를 "뜻있는 골프인"들의 도움으로
극복할수 있었다.

어려움이 가중될때 마다 그는 두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그가"영원한
선수"라는 의식이다. "나는 72홀을 돌아야 하는 프로다. 내가 36홀이나
54홀을 돌고 그만두면 후배프로나 일반골퍼들이 뭐라 하겠는가. 골프장
건설도 마찬가지로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또 한가지는 강원도 고성 어느 바닷가에서의 추억이다. 2년전 그는 워낙
머리가 아파 홀로 동해안을 찾았다. 인적없는 모래밭에 볼 몇개를 놓고
바다를 향해 툭툭 치고 있는데 갑자기 어린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야,저 아저씨 골프친다"
그 외침은 그에게 기적과 같은 힘을 주었다.

"이 한적한 바닷가의 아이들이 골프를 구경했을리 없다. 그런데도 저들은
골프를 알고 있다. 아,한국골프는 결코 어둡지 만은 않은것 아닌가"
일동수퍼시리즈의 창설도 그의 기본적 흐름과 맥락이 같다. 선수들이
45세만 넘으면 시합할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1년에 한번이라도
선배들에게 시합할 기회를 주자"는 취지였다.

금년들어 그는 잠못이루는 날이 많았다. 프로테스트 부정사건이니 해외
에서의 실격사건등 너무 가슴아픈 일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특히
프로테스트 부정은 그가 조사위원장을 맡아 해 묵은 환부를 도려냈다.

그는 늘 2000년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2000년대가 되면 골프에 대한 인식도 변하고 세계무대에서 뛸수있는
후배도 여럿 나타나 한국골프가 꽃필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때까지는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골프계사람들은 "김승학의 존재,김승학의 역할"을 알고있다. 그러나 그의
위치,역할이 외부에 표현 된 적은 거의 없다. 그것은 그의 스타일 때문
이기도 하지만 프로골프계 모두가 "더 큰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그 기대를 자신의 사명으로 흡수해야하는 본인은 아마 상당한 중압감을
느낄지 모른다. 그의 집념과 용기가 한국골프의 미래를 위해 더욱
굳어지기를 바란다.

<김흥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