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10월18일 주페테르부르크 프랑스대사관의 무관 자크 사도르대위는
본국정부에 이런 전문을 띄웠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페테르부르크 시내는
엉성한 무정부 상태였으나 오늘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적어도 엉성한
무정부상태는 아니다. 바로 내일이라도 유혈사태가 들이 닥칠것 같은
형국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창건지도자인 프레하노프 노인은
볼셰비키가 예고해온 "출격"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당내소수파인 레인과 트로츠키는 다수파의 의견을 밀어내고 정권탈취에
혈안이 되어있다"

이 보고서가 접수된지 1주일만에 볼셰비키에 의한 폭력행위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해 2월의 혁명에 의해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정권은
도망간 수반 케렌스키를 제외한 각료 전원이 동궁회의실에서 체포됨에 따라
허망하게 무너졌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러시아인민의 지지를 조직화
함으로써 "폭력"을 "혁명"으로 승화시켰다.

정변이 있은지 2주일후에 같은 증인이 또다시 이런 글을 남겼다. "거리는
완전히 평온해졌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에 반기를 들고 정부타도를 주도해온 루츠코이
전부통령과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 중심의 "보수"세력들은 5일 아침
백기를 들고 의사당을 빠져나옴으로써 패잔병이 되고 말았다. 한때는
수만명의 데모대원들을 동원,반옐친 구호를 외치며 모스크바 시내를
누볐으나 정부측의 압도적인 힙에 굴복하고 만것이다.

이번에는 사도르대위의 동족인 프랑스인 기자가 반옐친 보수파의 마지막
거점이 무너지는 순간을 포착 생생한 모습을 전하고 있다. "그들은
지방에서 곧 원군이 오리라고 기대했다.

사태가 수습된 다음 모스크바시민들을 상대로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옐친의 조처를 지지한 사람이 79%,보수파에 편을든 사람은 불과
9%미만이었다한다.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폭력은 한낱 "폭동"으로
기록되는 역사의 교훈을 새삼스럽게해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