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는 1468년 1월말부터 40일남짓 온양 행궁에 머물렀다. 그리고나서
그해 9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이것이 그의 마지막 거동이었던 셈이다.

온양에 내려온지 며칠 안되는 어느날 밤,그는 북문밖에서 들려오는 한
여인의 곡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괴이하게 여긴 세조는 그까닭을
알아보게 했다.

그 여인은 홍산의 정병이었던 나계문의 아내 윤덕영이었다. 죽은
지아비의 원수를 갚아줄 것을 호소하는 글을 직접 임금에게 올리기 위해
멀리 홍산에서 왔다는 것이었다.

"홍윤성의 비부 금석을산은 지난해 12월 첩의 지아비를 길에서 만나
무례하다는 이유로 엄동설한의 언 땅위에 발가벗겨 놓고 윤동질삼등 6명을
시켜 마구 때리게해 끝내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미 고인이된 성균사성 윤상은의 딸이라는 것을 밝힌 윤여인의 탄원서를
읽어내려 가던 세조는 이런 몹쓸 짓을 저지른 놈들이 자신이 총애하는
홍윤성(1425~1475)의 종들이라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홍산 현감 최윤은 홍윤성의 세도를 믿고 안하무인이었던 이들에게
협박당해 6명중 윤동질삼등 3명만을 옥에 가두었다. 3명도 홍윤성의 종
귀현 동질삼등이 폭력을 써서 탈옥시켜 버렸다. 살인한 종들이 버젓이
나돌아 다니는 것을 본 윤여인이 여러번 고소를 해 겨우 다시 잡아
가두도록 했으나 이번에는 충청도 관찬사 김지경이 방면해 버렸다. 그는
한술 더떠서 윤여인의 오라비와 죽은 지아비의 종형을 정승을 모해했다고
어거지로 얽어서 죄를 만들어 공주옥에 가두어 버렸다는 한맺힌 사연도
적어놓았다.

세조는 윤여인을 불러들여 일일이 캐어 물었다. 홍윤성의 죄는 그것뿐
만이 아니었다.

홍윤성이 정승이되자 윤여인의 지아비가 노비를 주지않는다고 잡아다가
곤장을 쳐서 거의 죽도록 만든 적도 있다고 했다. 홍윤성이 아비의 초상을
당해 시골에 내려와서는 군인2백여명을 풀어 윤여인집 동산에 있는 수십년
기른 소나무를 모조리 베어낸뒤 그 재목으로 자기네 집을 지었다고도 했다.
군역을 피해 도망한 장정들과 군에서 도망한 군졸들이 모두 홍윤성의 집에
숨어 있다는 윤여인의 말에 세조는 아연해졌다.

크게 노한 세조는 관찰사 김지경,현감 최윤등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친국했다. 모두가 사실임이 판명됐다.

그러나 세조는 홍윤성을 죄줄수는 없었다. "무를 하면서 문을 하지않으면
장수가 아니다"라고 늘 강조했던 세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어도
용모가 웅위하고 체력이 남보다 뛰어나 문무를 겸한 홍윤성을 웅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용맹스럽고 강인한 결단력이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거칠고
광망하며 교만해 제마음대로 날뛰는 성격상의 결함이 있다는 것도 세조는
잘 알고 있던 터였다.

홍윤성은 이미 28세때 정난공신으로 공신적에 올랐다. 이후 거의 매년
자급과 직책이 올라 34세때는 예조판서,42세때는 이미 우의정이 됐다.
이런 홍윤성의 경력만 보아도 세조가 그를 얼마나 총애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자 대간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극돈 조간등이
상소를 올려 홍윤성의 죄를 극렬하게 탄핵하고 나섰다.

생각다 못한 세조는 조간을 불러들여 구슬러 입을 막아버렸다.

"내가 너의 말을 가상하게 여긴다. 대간의 이름을 예전에만 듣고 그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내가 네게서 보았다"
조간에게 술한잔을 내리고 내보낸 세조는 이번에는 홍윤성을 불러들여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경에게 진실로 죄가 있다. 내가 경에게 죄를 가하지 않는 것은 책하는
대간의 말이 절실하고 지극하여 내가 이미 책망을 받았기 때문이다. 경도
또한 달게 받아라. 경의 실수하는 것은 기세를지어 다른 사람을 업신여김
에 있으니 경은 스스로 삼가라"
"세조실록"에는 이같은 임금의 말에 홍윤성은 단지 관을 벗고 사례할
따름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홍윤성의 죄를 덮어버린 세조가 이사건의 관련자들에게 내린 벌은
추상같았다.

"김석을산은 능지처참하고 윤동질삼 귀현등은 모두 참형에 처하며
충청도관찰사 김지경은 고신을 거두고 현감 최윤은 경옥에 가두라"
아의 병은 배부른데서 생기고 권신의 화는 임금의 총애에서 온다는
옛말을 곱씹어 보게하는 한토막의 이야기다.
<부국장대우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