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서랍을 열면 통장서너개씩은 보통 나왔었죠. 그게 어디
개인돈이었겠습니까. 일종의 은행안의 은행인 사금고라고 할수있죠".
80년초 업무개선실에서 지점감사를 주로 맡았던 I은행L부장의 말이다.
개인통장을 만들어놓고 정상적인 은행거래외에 기업체를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은행원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대형금융사고때마다 단골로 끼여드는
이른바 사금융을 일컫는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고하지만 사금융은
여전히 존속,은행산업을 뿌리부터 좀먹고있다는게 중론이다.

조흥은행 박모대리는 최근 거래기업체로부터 긴급한 부탁을 거절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지난4월말 교환돌아온 당좌수표를 제시간에 결제하지못한
A기업은 모자라는 돈 5백여만원을 변통해 줄 수 없느냐고 박씨에게
매달렸던것. 상당한 정도의 "보답"을 제의했던건 물론이었다. 당좌를
담당하는 박씨는 보상때문만이아니라 기업들의 그런 딱한 처지를
잘알고있어 도와주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그에게는 그만한 거액을 동원할 능력이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 그 기업은 용케 부도를 면했지만 "그만한 융통성이 없느냐"는
원망을 상당기간 받았다고 한다.

융통성 바로 여기에서 대부분의 사금융은 출발한다. 즉 돈을 예금하고
있는 다른 기업통장에서 하루만 인출했다가 다시 입금해놓으면 큰
탈없이 지나갈 수있다. 그기업에는 양해를 구하거나 아니면 모르는
방법으로 처리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박씨는 앉아서 떡고물을 챙길수있고
A기업은 부도를 면해서 좋다. 누이좋고 매부좋은 식이다.

이런 사소한 사금융행위를 80년대초까지만 해도 당좌나 대부를 맡고있는
대부분 은행원이 해왔다고한다. 그러다보니 자연 관리통장 서너개씩은
가지고있었고 씀씀이도 헤펐다고한다.

중소기업은행 G지점의 송모대리는 이런식의 사금융을 하다가 지난 2월
적발됐다. 송대리는 총38회에 걸쳐 6억1천만원을 거래업체에서 돈을 빌려
다른업체에 빌려주고 1백50만원을 받아 챙기다 해임조치됐다.

국민은행 장모부행장보는 영업부장시절 가명계좌를 개설, 4억8천만원의
자금을 만들어 거래업체에게 별도의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사금융행위를
하다 지난 4월 구속됐다. 장부행장보는 부장직급에 어울리게 거액의
여유자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돈을 필요한 업체에 빌려주고 은행이자보다
높은 금리를 받아 챙겼다. 작지만 은행속의 은행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송대리나 장부행장보는 사금융에관한한 어찌보면 "피라미"에
불과하다. 사채조성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까닭이다.

지난 83년 상업은행 혜화동지점의 "수기통장사건"의 김동겸대리는
사금융에 있어선 대부로 불릴만하다. 김대리는 4년3개월동안 무려
1천1백38억원이나 되는 사채자금을 끌어모아 명성그룹등에 빌려준걸로
밝혀졌다. 김대리는 손님이 6천만원을 입금하면 입금내용을 볼펜으로 쓴
통장(수기통장)을 만들어주고 은행에는 1백만원만 입금하는 식으로
5천9백만원을 개인목적으로 사용했다. 자금조성에 응한 예금주에게는
은행금리에 플러스 를(그것도 3개월선이자로)보장해주고 일반손님에게는
정상적으로 이자와 원금을 내주는 식으로 "김동겸은행"을 꾸려갔다.
그돈을 더 많은 이익이 나는 명성그룹에 투자한것은 물론이었다.
이런식으로 순전히 자기가 개설해 관리하는 통장만 모두 95개에 달했다고
한다.

같은 상업은행의 이희도 전명동지점장도 김대리수준에 못지 않았다. 다른
점은 김대리가 순전히 개인 목적이었다면 이지점장은 예금부풀리기라는
조직우선의 목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지점장은 한번 팔았던
양도성예금증서(CD)를 다시 파는등의 방법으로 사금고를 운영하다 결국
은행에 7백여억원의 부실을 남겨놓고 자살하고 말았다.

이같이 사금융은 은행원개인은 물론 은행전체에 치명상을 안겨주고 꼬리를
내리는게 대부분이다. 아무리 주머니돈이 생긴다 하더라도 비정상적인
방법이 오래갈수는 없는 노릇이다. 80년대초까지만해도 이런 사금융은
그야말로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후 은행이나 사정기관이
"명령휴가제"등을 도입, 사전예방식으로 집중적으로 단속해 최근에는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직급에 관계없이 사금융이 공공연히
행해진다는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아울러 이런 케케묵은 관행이
은행원 스스로의 지위를 떨어뜨리고 우리나라 금융산업전체를 낙후시키고
있다는 걸 더 잘 알고있다.

<하영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