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의 실학자 정약용의 호는 다산이지만 호의 유래는 정약용이
유배됐던 전남 강진에 있는 산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다산이란
지명으로 보면 예전에는 다를 산출했을것으로 짐작되지만 현재로서는
흔적이 거의 없다. 다만 정다산은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조에 들어와
쇠퇴하고있던 차문화의 명맥을 이어주었던 몇안되는 문인중의
한사람이었다.

차를 마시는 풍속은 중국 후한이후 남부지방에서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중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보급되어있다. 다의 음을 "차"또는 "다"로 읽기
때문에 혼란스럽지만 중국 당나라때까지는 "다"였다가 송대에 이르러
"차"로 변하였고 우리나라에는 "차"라는 말이 구어로 먼저 들어온데 원인이
있는 모양이다. 조상을 기리는 다례상에 다는 올라가지 않지만 이름은
남아있는것을 보면 예전에는 우리조상들도 차를 즐겨 마셨던것은
틀림없는것 같다.

우리나라에 차가 전래된것은 신라선덕여왕때라 한다. 고려조에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음다의 풍이 널리 확산되었고 국가의 주요행사에는
진다의식이 행해졌었다. 조선조에 이르러 이러한 유풍이 불교의 쇠퇴와
함께 감소되었고 임진왜란이후로는 차가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건너갔을 일본에서는 행다법이 발전되어 다도의
경지에 까지 이르고 있으며 독특한 차문화를 뽐내고 있다. 일본에서
명기라는 찻잔중에는 조선조때 일본에 약탈되어간것이 많다.

25일은 제13회 차의 날이다. 한국다인연합회와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공동주최하여 그 동안 커피등에 가려있던 우리의 전통차문화에 대한 강연회
전시회등이 열린다. 고려말 삼은중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은 "산 높고 물
맑은나라/땅이 신령스런 인걸의 나라/고려의 늙은이가 산에 살면서/불로
장생의 선다나 마시리"라고 차를 찬양하였다. 그만큼 차를 신성한것으로
생각했었다.

차문화가 널리 보급되면 우리국민의 정서생활이나 건강에 좋고 외화도
절약되며 도예의 발달에도 기여하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가정이나
다방에서 즐겨 커피를 찾는 것은 커피가 우리 차보다 가격이 싸고 끓이기가
손쉽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전기솥의 보급으로 숭늉 마시기도 어려운
만큼 우리의 전통차를 보급시킬 좋은 기회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