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뿌리] 삼성상회 .. 삼성모체 1938년 대구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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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상회가 간판을 내건곳은 대구 서문시장근처인 수동,지금의
인교동61의1에 있는 지상4층 지하1층의 목조건물이었다. 대구에 터를
잡은것은 이곳이 영남의 중앙에 위치,주변의 농수산물을 비롯한 각종
화물의 집산지이자 경부철도의 중간기착지로서 만주로 물건을 실어나르는데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삼성상회의 자본금은 3만원. 무역업외에도 제분기와 제면기를 설치해
소규모 제조업도 겸했다. 청과물은 대구근교산지에서 수집하고 건어물은
포항등에서 들여다 만주 북경지방등에 보냈다. 특히 대구가 명산지인
사과는 일본뿐아니라 만주에서도 가장 인기를 끈 청과물이었다.
국수도 무섭게 팔려나갔다. 당시는 일제의 미곡수탈이 날로 심해지면서
식량이 크게 부족할때였다. 삼성상회가 만든 "별표국수"는 부근 안동
봉화등지에서 온 도매상들에게 만들기 바쁘게 팔렸다. 한다발의 가격이
10전인 국수 60다발씩 포장된 상자가 하루 1백개이상씩 나갔다.
거래은행인 한성은행 대구지점에서의 대출한도액이 개업당시 10만원에서
1년후 20만원으로 늘어날만큼 사업이 번창했다.
이병철은 삼성상회의 성장을 발판으로 무언가 새로운 투자대상을 찾았다.
그 대상으로 떠오른것이 양조업이었다.
그 무렵 대구에는 8개의 양조장이 있었다. 4개는 일본인소유였고 4개는
우리나라사람이 경영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양조가
매물로 나와있었다. 이 양조장은 연간 7천섬의 생산능력을 가진 대구에서
첫손꼽히는 양조장이었으나 경영진의 내분으로 급히 팔려고 내놓았던
것이다. 이병철은 삼성상회를 시작한지 1년만인 1939년 이 양조장을
10만원에 인수했다.
양조업은 허가가 제한돼있어 커다란 이권사업이자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모든 경기가 침체돼있는 가운데 거의 유일한 호황업종이었다. 특별한
판촉전략이 없어도 할당량만 생산하면 저절로 팔려나갔다. 일제의
세수확대를 위한 밀주단속도 사업을 도와주었다. 조선양조는 이병철이
인수한지 1년만에 연간생산량 1만섬을 돌파했다.
삼성상회는 1941년 6월3일 "주식회사 삼성상회"로 등록했다.
개인상점으로 출발한지 3년3개월만에 근대적 기업형태를 갖춘것이다.
1945년 광부이후 사회의 혼란속에서도 삼성상회와 조선양조는 날로
성장해갔다. 대구만으로는 사업무대가 좁다고 생각한 이병철은 서울에서
본격적인 국제무역을 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11월 종로2가 영보빌딩근처
2층건물 1백여평을 빌려 삼성물산공사란 간판을 걸었다. 회사이름을
공사로 한것은 당시 국내무역상의 주거래선이 마카오 홍콩등의
화상이었으므로 이해를 빠르게 하기위해서였다.
삼성물산공사는 주식회사체제로 출범했다. 이병철이 75%를 출자했고
조홍제(효성그룹창업주) 김생기(영진약품") 이오석 문철호 김일옥등이
나머지 25%를 댔다. 만성적인 물자부족시대라 사업은 크게활기를 띠었다.
설립 1년후인 1950년3월결산에서 1억2천만원의 이익금을 냈으며 외형으로는
당시 상공부에 등록된 5백43개사가운데 천우사 동아상사 화신산업
남선무역등에 이어 7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모든것을 앗아갔다. 6.25동란으로 삼성물산공사가
수입,보관중이던 수십만근의 설탕과 면사 한약재 염료등 모든 자산이
하루아침에 불타버렸다.
대구로 내려온 이병철은 조선양조에서 건네받은 3억원을 사업자금으로
재기에 나서 1951년1월11일 부산 동광동에서 자본금 5천만원의 삼성물산을
새로 설립한다. 전쟁중이라 수입을 위한 달러확보의 길이 막막했던
삼성물산은 천우신조로 전쟁전 홍콩에 내보냈던 면실박수출대금 3만달러를
거래선으로부터 받게된다. 이 자금으로 설탕과 비료수입에 나서 6개월만에
10억원의 순익을 올린다. 전쟁인플레를 감안하더라도 경이적인
영업실적이었던 셈이다.
무역업으로 기반을 다진 이병철은 제조업으로 눈을 돌린다. 다각적인
검토끝에 수입대체가 시급했던 제당업에 진출키로하고 1953년8월 부산
대교로의 삼성물산본사에서 자본금 2천만환으로 제일제당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는 삼성이 종래의 한계적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하게된 분기점이었다. 이어 삼성은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대기업그룹으로 도약하기위한 기틀을 다진다.
삼성은 창업55주년인 올해 이건희회장이 제2창업2기출범을 선언하면서
세계 초일류기업으로의 도약을 다짐했다. 크고 작은 4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삼성그룹은 올해 50조원의 매출목표를 세우고 있다.
<추창근기자>
인교동61의1에 있는 지상4층 지하1층의 목조건물이었다. 대구에 터를
잡은것은 이곳이 영남의 중앙에 위치,주변의 농수산물을 비롯한 각종
화물의 집산지이자 경부철도의 중간기착지로서 만주로 물건을 실어나르는데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삼성상회의 자본금은 3만원. 무역업외에도 제분기와 제면기를 설치해
소규모 제조업도 겸했다. 청과물은 대구근교산지에서 수집하고 건어물은
포항등에서 들여다 만주 북경지방등에 보냈다. 특히 대구가 명산지인
사과는 일본뿐아니라 만주에서도 가장 인기를 끈 청과물이었다.
국수도 무섭게 팔려나갔다. 당시는 일제의 미곡수탈이 날로 심해지면서
식량이 크게 부족할때였다. 삼성상회가 만든 "별표국수"는 부근 안동
봉화등지에서 온 도매상들에게 만들기 바쁘게 팔렸다. 한다발의 가격이
10전인 국수 60다발씩 포장된 상자가 하루 1백개이상씩 나갔다.
거래은행인 한성은행 대구지점에서의 대출한도액이 개업당시 10만원에서
1년후 20만원으로 늘어날만큼 사업이 번창했다.
이병철은 삼성상회의 성장을 발판으로 무언가 새로운 투자대상을 찾았다.
그 대상으로 떠오른것이 양조업이었다.
그 무렵 대구에는 8개의 양조장이 있었다. 4개는 일본인소유였고 4개는
우리나라사람이 경영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양조가
매물로 나와있었다. 이 양조장은 연간 7천섬의 생산능력을 가진 대구에서
첫손꼽히는 양조장이었으나 경영진의 내분으로 급히 팔려고 내놓았던
것이다. 이병철은 삼성상회를 시작한지 1년만인 1939년 이 양조장을
10만원에 인수했다.
양조업은 허가가 제한돼있어 커다란 이권사업이자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모든 경기가 침체돼있는 가운데 거의 유일한 호황업종이었다. 특별한
판촉전략이 없어도 할당량만 생산하면 저절로 팔려나갔다. 일제의
세수확대를 위한 밀주단속도 사업을 도와주었다. 조선양조는 이병철이
인수한지 1년만에 연간생산량 1만섬을 돌파했다.
삼성상회는 1941년 6월3일 "주식회사 삼성상회"로 등록했다.
개인상점으로 출발한지 3년3개월만에 근대적 기업형태를 갖춘것이다.
1945년 광부이후 사회의 혼란속에서도 삼성상회와 조선양조는 날로
성장해갔다. 대구만으로는 사업무대가 좁다고 생각한 이병철은 서울에서
본격적인 국제무역을 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11월 종로2가 영보빌딩근처
2층건물 1백여평을 빌려 삼성물산공사란 간판을 걸었다. 회사이름을
공사로 한것은 당시 국내무역상의 주거래선이 마카오 홍콩등의
화상이었으므로 이해를 빠르게 하기위해서였다.
삼성물산공사는 주식회사체제로 출범했다. 이병철이 75%를 출자했고
조홍제(효성그룹창업주) 김생기(영진약품") 이오석 문철호 김일옥등이
나머지 25%를 댔다. 만성적인 물자부족시대라 사업은 크게활기를 띠었다.
설립 1년후인 1950년3월결산에서 1억2천만원의 이익금을 냈으며 외형으로는
당시 상공부에 등록된 5백43개사가운데 천우사 동아상사 화신산업
남선무역등에 이어 7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모든것을 앗아갔다. 6.25동란으로 삼성물산공사가
수입,보관중이던 수십만근의 설탕과 면사 한약재 염료등 모든 자산이
하루아침에 불타버렸다.
대구로 내려온 이병철은 조선양조에서 건네받은 3억원을 사업자금으로
재기에 나서 1951년1월11일 부산 동광동에서 자본금 5천만원의 삼성물산을
새로 설립한다. 전쟁중이라 수입을 위한 달러확보의 길이 막막했던
삼성물산은 천우신조로 전쟁전 홍콩에 내보냈던 면실박수출대금 3만달러를
거래선으로부터 받게된다. 이 자금으로 설탕과 비료수입에 나서 6개월만에
10억원의 순익을 올린다. 전쟁인플레를 감안하더라도 경이적인
영업실적이었던 셈이다.
무역업으로 기반을 다진 이병철은 제조업으로 눈을 돌린다. 다각적인
검토끝에 수입대체가 시급했던 제당업에 진출키로하고 1953년8월 부산
대교로의 삼성물산본사에서 자본금 2천만환으로 제일제당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는 삼성이 종래의 한계적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하게된 분기점이었다. 이어 삼성은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대기업그룹으로 도약하기위한 기틀을 다진다.
삼성은 창업55주년인 올해 이건희회장이 제2창업2기출범을 선언하면서
세계 초일류기업으로의 도약을 다짐했다. 크고 작은 4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삼성그룹은 올해 50조원의 매출목표를 세우고 있다.
<추창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