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레이디라는 말은 남북전쟁에 종군한 런던의 더 타임스 특파원
윌리엄 러셀이 1863년 그의 책에서 쓴 "퍼스트 레이디 인 더 랜드"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1814년8월 워싱턴을 포위한 영국군이 백악관을 향해
진군할무렵 당시의 매디슨대통령은 이미 피신을 떠났다. 45세였던 부인
돌리 매디슨은 영국군이 문앞에 당도하기 직전까지 백악관에 남아 중요
기밀문서의 소각을 지켜보고 조지 워싱턴 초상화의 프레임을 렌치로 비틀어
그림의 알맹이를 챙기는등 "나라 제일의 여성"다운 면모를 보였다.

윌슨 대통령은 1919년 가을 전국 순회연설도중 쓰러져 부분 마비상태에
빠졌다. 부인 에디스 볼링 윌슨은 윌슨대통령의 분신처럼 행세해 "퍼스트
레이디"가 아닌 "퍼스트 맨 대행"으로 불리기도했다.

클린턴대통령은 집무를 시작하면서 부인을 국민의료보호체제개혁을 위한
특별대책위위원장에 임명하고 그녀 이름을 "힐러리 로담 클린턴"으로
공식화했다. "로담"은 처녀때 성으로 그녀는 결혼후에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않고 "자의식의 상징"인 힐러리 로담을 그대로 썼다. 80년 클린턴이
주지사선거에 패배한 후 여론을 의식,힐러리 클린턴으로 남편 성을 따랐고
주지사가 되고나서 "힐러리 로담 클린턴"으로 "로담"을 가운데 끼워넣었다.

대통령선거전때 이 "로담"을 뺐다가 퍼스트 레이디가 되고나서 다시
"로담"으로 되돌아왔다.

역대퍼스트레이디들은 백악관 동관에서 의전위주의 일과를 보내는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클린턴여사는 대통령집무실이 있는 서관에 따로
사무실을 갖고 "우리 두사람 대통령"(We the President)이란 주어를
거침없이 쓰고있다. 의료대책위 위원장은 월급을 받는 자리는 아니지만
재무 국방 상무 보건장관과 예산실장을 위원으로 거느린다.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논란이 많은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클린턴대통령은 "조직력과 이견조정에서 그녀보다 나은 사람을 지금껏
보지못했다. 그녀가 얼마나 유능한 지를 국민들은 곧 알게될 것"이라고
자랑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국민이 뽑지도 않은 사람을,대통령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큰 역할을 부여할수 있느냐는 투정섞인 핀잔도
끈질기다. 여론은 반이 갈리고,"로담"의 복귀에는 대다수가 부정적이다.
빌과 힐러리 부부가 합작한 "빌러리"대통령이 탄생할지,현대판"레이디
맥베스"로 정치적 재앙을 불러올지는 실로 속단을 불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