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조(조)의 획을 줄인 글자 아래에 뫼 산(산)을 밑받침으로 한 섬
도(도)-그것은 새가 바다 가운데 산처럼 앉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새와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섬이야말로 시상을 떠올리는데
안성맞춤이다.

고은 시인은 섬을 이렇게 예찬한바 있다.

"섬은 사람에게/꿈 혹은 임을 낳는다/그리고/꿈이나 임을 묻어버리기도
한다/바다는 대지 이상이다/죽음은 대지를 낳고/사람은 섬을 낳는다"
조선조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에게 있어서 섬의 이미지는 꿈의 대상은
아니었다. 나라에 죄를 지은 사람들의 유배지가 되었을뿐이다. 때로는
전쟁의 참화를 면하려는 사람들이나 속세를 멀리하려는 의인들의 피신처가
되기도 했다.

세상의 명리를 등지고 오직 후학의 교육에만 심혈을 기울였던 구한말
유학의 거봉 간재 전우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것을 철회해야
한다는 상소를 조정에 두차례나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해안의
고도들로 숨어버린다.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바다로 나아간다"는 공자의
말씀을 따랐던 것이다. 1922년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지막 10년을
보낸 곳은 전북부안군 변산반도 북단에서 4 쯤 떨어진 계화도였다. 지금도
그가 살았던 집터(부안군계화면양지리)에는 계양사라는 사당이 그의 의기와
족적을 되새겨 주게한다.

그가 떠나버린 계화도가 벽해상전이 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바다를
떠돌려던 그의 뜻이 담긴 무대는 사라졌다. 1963~68년의 간척공사로
부안군동진면과 연결되면서 섬의 시대를 마감한 결과였다.

간척지에 생긴 옥토는 무려 2,741 . 78년부터 "계화도 쌀"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이곳 간척지 논에는 병충해가 거의 없어 농약사용이 다른
지역의 20%이기 때문에 "무공해 쌀"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었다. 그러나
"계화도 쌀"로 둔갑한 가짜들이 횡행해 이 쌀의 경작자들은 골머리를
앓아왔다.

그런데 이번에 "계화도 쌀"이 쌀로서는 처음으로 정부의 인증을 받아
농협에 출하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일반미보다 10%정도 비싼
값이지만 식품공해공포에 찌들려온 소비자들에게는 희소식임에 틀림없다.
무공해 농산물의 계통출하가 아쉬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