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뒤인 1948년에 제작 상영된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변사의 구성진 대사에 극적인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할 것이다. 1935년 "춘향전"이 발성영화시대의
막을 연이후 13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무성영화를 다시 내놓을수
있었던 것은 변사의 역할에 향수를 느끼던 애호가들의 성원을 뿌리칠수
없었기때 문이었을런지도 모른다.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한국인의 손으로는 최초로 "의리적
구투"라는 연 극(무대에서 나타낼수 없는 장면을 영화로 보여주는 극)에
삽입되는 무성영화를 만들어 국산영화제작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후
본격적인 무성영화"월하의 맹서"에서 발성영화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무성영화시대를 구가했다. 그 절정기는 나운규의 "아리랑"에서 비롯된다.

거기에 빼놓을수 없는 존재가 변사였다. 구미의 무성영화에서는
보조수단으로 자막을 삽입하여 대화나 줄거리의 진행을 나타내 주었으나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변사라는 직업인이 등장하여 스크린에 펼쳐지는
스토리의 진행과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관객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감격과
애상,영탄과 비탄,강조와 은유등의 어조가 교차되는 변사의 사설이
관객들을 울리고 웃기는 구실을 했다.

한국영화사를 들추어 보면 변사의 역할이 그것에서만 끝나지는 않았다.
영화대본을 쓴 사람도 있다. 1927년 금강키네마사가 제작한
"낙화유수"라는 작품의 대본을 만든 김영환이라는 단성사소속의 변사가
그사람이다. 그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좋은 가문 출신의 화가(이원용분)가 울적함을 달래기위해 기방에
출입하다가 한 기생(복혜숙분)을 사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화가집안의 반대로 좌절되고 실연당한 기생은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게 된다.

그당시 자주 볼수 있었던 신파멜로드라마의 전형인 이 영화는 38년
조선일보영화제에서 "무성영화 10선"에 뽑히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 작품의 필름과 변사용 대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영화팬들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현재 보존되어 있는 최고의 영상자료인
"자유만세"(46년작)보다 20년이나 앞선 것이라는 것도 뜻깊은 일이 아닐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