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인이 된 어느 외교관이 외무부차관보로 있던 때의 일이다.
74년10월 그는 일단의 정부.업계대표단을 이끌고 브뤼셀에서
유럽공동체(EC)대표단과 한.EC간 쌍무섬유협정타결을 위한 막바지 협상을
벌여야했다.

당시 섬유는 우리 수출의 사활이 걸린 상품이었으며 따라서 73년말 타결된
GATT(관세무역 일반협정)다자간섬유협정(MFA)에 입각해서 새로운 제한을
가하려는 이 쌍무협정협상은 국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중요한
외교무대였다.

협상은 정확하게 한달동안의 마라톤회의끝에 타결되었다. 때로는
심야회의도 했다. 공식회의의 진행과 발언은 시종 쌍방 수석대표 몫이다.
합의된 협정문의 가서명과 동시에 협상이 명실상부하게 종료된 순간
10여명의 남녀 EC본부 동시통역요원들이 일제히 우리측 수석대표에게
몰려가 이구동성 빈틈없고 격조높은 그의 발언에 감복했다면서
통역기회를 가졌던걸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협상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뒤에 상공부장관으로
국가원수의 동남아방문을 수행하던중 아웅산폭발사건으로 그만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변해도 엄청나게 변했다. 48년 정부수립당시와
비교해서는 말할것없고 50년대 70년대와도 딴판이다. 몰라보게
변한것가운데 하나가 다름아닌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이다.
국제경제사회에서 그 지위가 격상된것은 물론이고 탈냉전과 신국제질서의
태동와중에서 지난해에 오랜 옵서버국의 굴욕을 벗어나 유엔의
정회원국으로 가입되고부터는 정치적 입지도 껑충 뛰었다.

국제적 지위와 위상변화는 활동무대와 역할,조직과 요원의 자질등 모든
부문에서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요구하며 그런 요구가 무리없이 수용될때
비로소 국익과 국가발전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다 자란 어른이 되고서도
여전히 어린이의 옷을 걸치고 걸어가는 그런 몰골이다.

이제 우리 외교관들은 국제외교무대에서 국가를 대표하고 국익을
챙겨야할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개도국전부 혹은 아시아국가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게끔 되었다. 말석이나 회의장주변에서 귀동냥을
한다거나 미리 쓴 글을 읽고 말던 시대를 지나 의장국으로 국제회의를
주재하거나 이사국으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많아졌으며
갈수록 많아질 전망이다.

북방국가들을 포함해서 우리가 쌍무적 혹은 다자간에 머리를 맞대고
흥정을 해야할 상대와 기회도 그만큼 더 늘었다.

유능하고 우수한 외교관이 그 어느때보다 많이 필요해졌다. 갈수록 더할
것이다. 직업외교관뿐이 아니다. 경제기획원 재무부 농림수산부 상공부
심지어 환경처와 국세청 그리고 지방정부에 이르기까지 투철한 국가관과
전문지식,세련된 매너와 기민한 국제감각,깊고 넓은 외국어구사능력을 갖춘
전문요원들이 부지기수로 요망된다. 그런데도 그런 외교관과 요원이
태부족한게 우리 현실이다. 지금 당장은 물론이고 국가장래를 위해 심각한
문제이다. 정부가 서둘러 해답을 찾아내고 극복해야할 초미의 과제이다.

우선 이 분야의 인재선발방법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야하고 둘째
교육훈련에 일대 개혁이 필요하다. 범정부적으로 대처해야한다. 현재
행정고시로 한정되어 있다시피한 선발방법의 개선과 함께 선발인원의
대폭적인 확대,그리고 신.기성요원에 대한 보다 과학적이고 강화된
교육제도가 강구돼야 한다.

지난 70년말 불과 65개이던 우리의 재외상주공관수는 78년말
1백8개,금년5월말현재 1백36개로 불어났으나 외무부정원은 정부수립순간의
1백60명에서 30년뒤인 79년말 고작 9백72명으로 증가한데이어 지금도
본부와 재외공관을 모두 합쳐 1천7백명이 채 안된다. 그나마 재외공관몫은
6백51명으로 전체의 38%에 불과하며 여기에 2백명가까운 다른부처
주재관들이 함께 뛰고 있다.

유능한 인재와 관료를 양성 배출하는 문제에 접할적마다 사람들은
프랑스의 4대 고등교육기관을 떠 올린다. 행정대학(Ecole Nationale d Ad-
ministration) 이공대학(Ecole Polytechnique) 사범대학(Ecole Normale)
상업대학(Ecole Commerciale)이 그것이다. 모두 국립이다. 이중에서도
행정대학(ENA)은 프랑스의 정치 경제 사회지도자와 엘리트를 배출하는 가장
핵심적인 교육기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굳이 모방할것까지는 없더라도 선진국들의 사례를 거울삼아 교육제도와
선발방법에 일대 수술을 가해야한다.

지금까지와 같은 획일적인 교육과 고식적인 선발방법으로는 안된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더 늦기전에 서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