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사설(20일자)> 더 큰 책임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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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초 일본이 트랜지스터의 주요원료인 게르마늄을 최초로
회수할때의 얘기다. 당시 석탄종합연구소 엔지니어였던 이나가키씨는
실패의 연속끝에 석탄폐액에서 흰색분말을 얻어냈다. 이것이 게르마늄인지
아닌지를 실험하는 일만 남아있었다. 섭씨 1,000도의 불꽃으로 태워보고
분말이 타버리면 게르마늄이 아니고 변하지 않으면 일본 최초의 게르마늄이
되는 것이다. 어느날 그는 집에서 이를 실험했다. 1952년11월의
추운겨울밤이었다. 부엌에서 둥근 스푼에 흰색분말을 넣고 가스곤로에
불을 피워 가열했다. 부인이 스푼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10분이 넘게
불을 달구어 스푼손잡이까지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였지만 부인은 참고
견뎠다. 그런데도 분말은 꼼짝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 "됐다. 이제
일본도 게르마늄을 얻었다. 석탄이 있는한 일본에 게르마늄 걱정은
없다"하고 이나가키는 외쳤다. 이제 이 분말로 만든 돌이 세상을 크게
변하게 할것이고 라디오는 포켓속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질 것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처음 점접촉형 트랜지스터시험제작에 성공한 사람은 당시
전기통신성 통신연구소에 갓 입소한 젊은 연구원 이와세씨였다. 그는
트랜지스터에 쓰는 게르마늄의 순도를 높이는 것이 과제였다. 이와세씨가
생각한 방법은 도가니에 넣은 결정을 밑에서부터 가열하여 불순물이 위에
떠오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히터를 밑에서부터 위로 이동하게
해야한다. 정밀기계나 제어장치등이 없는 상태에서 이일을 해내야 했다.
그는 수없는 생각끝에 양동이 밑에 구멍을 뚫고 수도꼭지를 달았다.
양동이에 가득 물을 채우고 부표를 띄워 부표와 히터를 실로 연결하였다.
이런 원시적 방법으로 드디어 게르마늄정련에 성공한 것이다.
전후의 잿더미속에서 일본의 기술개발을 부추긴 동기는 일본은 경제와
기술이 떨어져 패망했기 때문에 이제는 경제와 기술로 이기자는
열정이었다. 그리고 마굿간 실험실의 무대배경은 덜컹거리는 일본차를
제치고 쌩쌩 달리는 미국의 캐딜락과 미국병사의 팔에 매달려 호텔을
드나드는 일본여성의 광경이었다.
반도체재료는 게르마늄으로부터 실리콘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이같은
성공은 일시적이었다. 그러나 노르웨이나 브라질에서 생산된 실리콘은
순도 98의 쓸모 없는 것이었는데 일본은 이를 순도99. 999999999까지
정련하여 세계반도체시장 제패의 길을 열었다. 1,000억개의
실리콘원자속에 단1개의 타원자가 섞인 실로 경이로운 경지다.
오늘날 일본은 외국인이나 보도진들에게 실리콘공장을 견학시키고 있다.
하지만 무수한 노하우가 모여있는 실리콘가마의 바닥구조에는 접근을
금지하고있다.
지난 16,17일 두차례에 걸쳐 열렸던 한일정상회담은 무역역조시정과
기술이전문제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기들만 돌출하듯
발전하겠다는 일본의 폐쇄성에 실망을 감출수 없지만 설혹 이번 회담에서
어떤 가시적조치가 있었다 해도 그것으로 무역역조나 우리의 기술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우리는 일본의 태도에서 보다는 더 많이 우리자신에게 실망해야 하며
우리문제는 우리만이 해결할수 있고 남이 해결해줄수 없다는 점을 국권을
지킨다는 차원으로 깨달아야 한다. 우리자신의 실리콘가마를 만들지
않고는 일본의 실리콘가마뚜껑을 열수 없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세계3위의 반도체생산국이 되었다. 이것은 반도체제조장비의 90%이상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구조속에서 이룬 일이다. 한국무역적자의 90%이상이
대일적자라는 점과 일치한다.
일본의 연구소들은 요즘도 밤11시까지 불이 켜져있다고 한다. 일에의
열정이 연구원들의 귀가시간도 잊게 하는 것이다.
저녁 5 6시만되면 퇴근하기에 바쁜 한국의 대부분 연구원들이 그들에게
기술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고는 결코 따라갈 수 없다.
전후 일본이 가진 것은 돈도 첨단장비도 아닌 정열과 시간과
지혜뿐이었다. 스푼과 물동이실험으로 부터 시작하여 오늘의 일본을
이룩했다. 오늘 우리는 돈과 최신장비부족을 탓하지만 열과 성의 부족함을
더 탓해야하며 이것이 올바로 되지 않으면 외국첨단기술이 개방된다 해도
소용이 없다. 기술획득이 용이했던 시대에 그때 선진국들이 일본에만
기술이용면허를 내준 것은 아니었다. 일인들의 정신이 월등했을 뿐이다.
한국의 총연구개발비는 미국의 약50분의1,일본의 26분의1에 불과하다.
일본은 미국보다 훨씬 적은 연구개발비로 미국을 능가하는 연구실적을
올리고 있다. 연구실에 더 오래 불이 켜져있기 때문이다. 일본보다도 더
턱없이 적은 연구개발비를 가지고 있는 한국이 해야할 일도 뻔하다.
그들보다 더 오래 연구실에 불이 켜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못한다면
기술의 종속과 무역역조는 영영 벗어날수 없게 된다.
기술돌파(Breakthroughs)는 양동이로도 해낼수 있다는 정열과 자신감을
북돋워야 가능하다. 그러면 자금과 장비와 제도가 뒤따를 것이고 그것들이
비로소 상승작용을 할 것이다. 국가적 의지가 없으면 물질적 조건은 바람
빠진 공이 되고 만다. 독자적 기술축적만이 선진화의 열쇠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
회수할때의 얘기다. 당시 석탄종합연구소 엔지니어였던 이나가키씨는
실패의 연속끝에 석탄폐액에서 흰색분말을 얻어냈다. 이것이 게르마늄인지
아닌지를 실험하는 일만 남아있었다. 섭씨 1,000도의 불꽃으로 태워보고
분말이 타버리면 게르마늄이 아니고 변하지 않으면 일본 최초의 게르마늄이
되는 것이다. 어느날 그는 집에서 이를 실험했다. 1952년11월의
추운겨울밤이었다. 부엌에서 둥근 스푼에 흰색분말을 넣고 가스곤로에
불을 피워 가열했다. 부인이 스푼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10분이 넘게
불을 달구어 스푼손잡이까지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였지만 부인은 참고
견뎠다. 그런데도 분말은 꼼짝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 "됐다. 이제
일본도 게르마늄을 얻었다. 석탄이 있는한 일본에 게르마늄 걱정은
없다"하고 이나가키는 외쳤다. 이제 이 분말로 만든 돌이 세상을 크게
변하게 할것이고 라디오는 포켓속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질 것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처음 점접촉형 트랜지스터시험제작에 성공한 사람은 당시
전기통신성 통신연구소에 갓 입소한 젊은 연구원 이와세씨였다. 그는
트랜지스터에 쓰는 게르마늄의 순도를 높이는 것이 과제였다. 이와세씨가
생각한 방법은 도가니에 넣은 결정을 밑에서부터 가열하여 불순물이 위에
떠오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히터를 밑에서부터 위로 이동하게
해야한다. 정밀기계나 제어장치등이 없는 상태에서 이일을 해내야 했다.
그는 수없는 생각끝에 양동이 밑에 구멍을 뚫고 수도꼭지를 달았다.
양동이에 가득 물을 채우고 부표를 띄워 부표와 히터를 실로 연결하였다.
이런 원시적 방법으로 드디어 게르마늄정련에 성공한 것이다.
전후의 잿더미속에서 일본의 기술개발을 부추긴 동기는 일본은 경제와
기술이 떨어져 패망했기 때문에 이제는 경제와 기술로 이기자는
열정이었다. 그리고 마굿간 실험실의 무대배경은 덜컹거리는 일본차를
제치고 쌩쌩 달리는 미국의 캐딜락과 미국병사의 팔에 매달려 호텔을
드나드는 일본여성의 광경이었다.
반도체재료는 게르마늄으로부터 실리콘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이같은
성공은 일시적이었다. 그러나 노르웨이나 브라질에서 생산된 실리콘은
순도 98의 쓸모 없는 것이었는데 일본은 이를 순도99. 999999999까지
정련하여 세계반도체시장 제패의 길을 열었다. 1,000억개의
실리콘원자속에 단1개의 타원자가 섞인 실로 경이로운 경지다.
오늘날 일본은 외국인이나 보도진들에게 실리콘공장을 견학시키고 있다.
하지만 무수한 노하우가 모여있는 실리콘가마의 바닥구조에는 접근을
금지하고있다.
지난 16,17일 두차례에 걸쳐 열렸던 한일정상회담은 무역역조시정과
기술이전문제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기들만 돌출하듯
발전하겠다는 일본의 폐쇄성에 실망을 감출수 없지만 설혹 이번 회담에서
어떤 가시적조치가 있었다 해도 그것으로 무역역조나 우리의 기술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우리는 일본의 태도에서 보다는 더 많이 우리자신에게 실망해야 하며
우리문제는 우리만이 해결할수 있고 남이 해결해줄수 없다는 점을 국권을
지킨다는 차원으로 깨달아야 한다. 우리자신의 실리콘가마를 만들지
않고는 일본의 실리콘가마뚜껑을 열수 없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세계3위의 반도체생산국이 되었다. 이것은 반도체제조장비의 90%이상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구조속에서 이룬 일이다. 한국무역적자의 90%이상이
대일적자라는 점과 일치한다.
일본의 연구소들은 요즘도 밤11시까지 불이 켜져있다고 한다. 일에의
열정이 연구원들의 귀가시간도 잊게 하는 것이다.
저녁 5 6시만되면 퇴근하기에 바쁜 한국의 대부분 연구원들이 그들에게
기술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고는 결코 따라갈 수 없다.
전후 일본이 가진 것은 돈도 첨단장비도 아닌 정열과 시간과
지혜뿐이었다. 스푼과 물동이실험으로 부터 시작하여 오늘의 일본을
이룩했다. 오늘 우리는 돈과 최신장비부족을 탓하지만 열과 성의 부족함을
더 탓해야하며 이것이 올바로 되지 않으면 외국첨단기술이 개방된다 해도
소용이 없다. 기술획득이 용이했던 시대에 그때 선진국들이 일본에만
기술이용면허를 내준 것은 아니었다. 일인들의 정신이 월등했을 뿐이다.
한국의 총연구개발비는 미국의 약50분의1,일본의 26분의1에 불과하다.
일본은 미국보다 훨씬 적은 연구개발비로 미국을 능가하는 연구실적을
올리고 있다. 연구실에 더 오래 불이 켜져있기 때문이다. 일본보다도 더
턱없이 적은 연구개발비를 가지고 있는 한국이 해야할 일도 뻔하다.
그들보다 더 오래 연구실에 불이 켜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못한다면
기술의 종속과 무역역조는 영영 벗어날수 없게 된다.
기술돌파(Breakthroughs)는 양동이로도 해낼수 있다는 정열과 자신감을
북돋워야 가능하다. 그러면 자금과 장비와 제도가 뒤따를 것이고 그것들이
비로소 상승작용을 할 것이다. 국가적 의지가 없으면 물질적 조건은 바람
빠진 공이 되고 만다. 독자적 기술축적만이 선진화의 열쇠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