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자 고당 조만식 선생은 한국전쟁 초기인 지난 50년 10월
유엔군에 밀려 퇴각하는 북한인민군에 의해 평양에서 총살된
것으로 19일 전해졌다.
이같은 내용은 중앙일보 기자가 모스크바에서 북한 외무성부상(차관)
등 요직을 지내다 지난 59년 소련으로 망명해 현재 소과학아카데미 산하
동방연구소 선임연구위원으로있는 박길용박사(71) 등과의 회견을 근거로
보도했다.
지금까지 조만식 선생의 최후와 관련, 신탁통치 반대 등을 이유로
지난 46년 연금된후 행방불명돼 고령으로 자연사 했거나 아니면
<>6.25전쟁중 북한정권에 의해 처형됐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사망시기 및 사인 등에 관해서는 밝혀진 내용이 없었다.
북한인민군은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이 평양으로 접근해오자
주요정부 기관을 평북(현재의 자강도) 강계로 옮기기로 결정한 후 당시
붙잡고있던 조만식선생 등 5백여명의 정치범 및 치안사범을 이동시킬
수없다고 판단, 50년 10월 18일밤 평양형무소에서 총살했다고 박박사는
전했다.
한국동란 당시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으로 김일성 현북한주석의
러시아어 통역일을 맡고 있었다고 전한 박박사는 조만식 선생 등이
총살됐다는 소식을 강계로 후퇴한 후 북한 지도부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박박사는 북한군이 조만식 선생 등을 처형한 후 대동강변에 웅덩이를
파묻거나 그대로 놔둔채 황급히 후퇴했다는 소식도 아울러 전해 들었다고
덧붙였다.
북한당국은 50년 12월 중국의 군사지원에 힘입어 평양을 탈환하자
웅덩이를 다시 파 조만식 선생 등의 시신을 꺼내 "유엔군과 이승만
괴뢰군이 수많은 민족지도자들을 죽이고 달아났다"고 선전했다고 박박사는
회고했다.
박박사는 처형 소식을 듣기전인 50년 10월초 이른바 `소련파''의 총수로
불리던 당시 노동당 제1서기 허가이(53년 숙청됨)로부터 조만식 선생 등의
처리문제와 관련 , "후퇴하면서 반동분자들을 끌고 갈 수없으니 모두 목을
따버리라는 지시가 이미 내려갔다"는 말도 들었다고 전했다.
일제 치하에서 물산장려운동 및 3.1운동 등 반일운동을 지도했던
민족지도자의 한사람인 조만식 선생은 1882년 평남 강서군 태생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행방 불명돼 생사가 묘연한 가운데 북한당국에 의해
처형됐을 것으로 막연히 추정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