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수단에서 굶어 죽어가는 한 소년의 모습이다. 피골이 상접해
야윈 노인이 아닌가란 착각을 들게했다. 피부색이 달라도 어딘가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아스라이 6.25동란때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는 지금 다행히 기아로부터 해방된 세대를 살고 있다. 영세민이
사회문제가 되고,장바구니 물가와 씨름한다지만 최소한 굶어 죽을 걱정은
없다. 오히려 남아도는 쌀의 보관창고가 걱정이고,과영양상태에서 오는
성인병이 두려워 육류섭취를 꺼리고 있다.
사시사철 신선한 야채와 과일은 말할것도 없고 수입바나나가 어린이
입맛을 버린다는 논쟁도 일어난다.
그러나 6.25경험세대는 굶주림의 고통을 안다. 특히 적치하 3개월 수도
서울시민의 고통이 극심했다. 농사가 없는 도시민들에게 먹을 양식이
있을수 없다. 매일매일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하는 절박감이 죽음보다도
힘들었다. 사실상 굶다못해 의용군을 자원하여 억울하게 죽어간
젊은이들도 한둘이 아니다.
6.25동란의 어려움을 말하면 으레 꽁보리주먹밥 수제비 개떡이 등장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당시 상태는 훨씬 심각했다. 맨소금에
꽁보리밥을 손으로 주물러 만든 주먹밥이 어디 있었으며 차진 수제비를
만들 흰밀가루가 어디에 있었는가. 반죽으로 만든 밀가루 음식이나 된밥은
상상도 못할 처지였다.
전쟁동안 도시민들은 주로 죽이나 범벅으로 연명했다. "호박범벅"은
호박풀떼기라고도 불렀다. 납작보리가루나 밀기울을 물반,가루반으로
섞고,거기다 호박을 썰어넣어 풀처럼 쑨 음식이다. 쑥을 곁들인 개떡이면
양반음식이었다. 지금 청소년들은 입에 대지도 못할 것이다.
21일 서울대학교에서 개최된 "6.25때 음식먹기운동"결과가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결론도 없는 엉뚱한 사상논쟁으로 마감됐다는 것이다.
"한사랑선교회"가 6.25동란 41주년을 맞아 "당시 참상을 체험하여 윤리성을
회복하자"란 취지의 행사였다.
논쟁은 "새삼스럽게 전쟁을 상기시켜 반공의식을 조장하려한다"는
총학생회 항의로 시작됐다. 결국 장장 3시간 동안 갑론을박을 벌인 끝에
"현정권을 지원하는 선교회는 각성하라"란 대자보로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논쟁의 한편에 설 의향은 없다. 그러나 쓴 개떡을 한입 물어 자신을 직접
키워준 부모의 시련기를 맛본다는 것은 어느모로 보나 의의가 있었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