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서 수도권 노동자 결의대회...1천여명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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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일본군과 민간인들이 사할린에서 어린이,부녀자등 조선인
27명을 집단학살한 사건의 전모가 소상히 기록돼 있는 자료가 발견됐다.
이 자료는 1945년 8월20일부터 23일까지 4일간 홈스크동쪽
파잘스키마을에서 일본인들이 자행한 조선인 집단살륙사건에 대한
소련당국의 조사내용, 학살된 조선인들의 시체검안결과, 재판기록 등이
요약.정리된 것으로 그동안 소련정보기관이 `대외비문서''로 분류,보관해
오던 것이다.
관련사진과 함께 입수된 이 자료에는 당시 일본인들의 집단학살
모의단계서부터 살륙과정, 방법등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기간중 강제징용.징병.정신대 등으로 끌고간
조선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각종 만행의 전모가 기록에 의해 생생하게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다음은 이 자료 가운데 학살을 자행한 일본인이 군사재판에서 진술한
학살진상을 간추린 내용이다.
<>호소가와 히로시(당시 26세. 처형됨. 학살조직자)
"당시 일본인들은 사할린 여러마을에서 조선인들이 붉은군대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지원해주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 일본인들은 붉은
군대가 우리마을에 들어오면 조선인들이 소련군에 가담, 일본인을 원수로
여길 것을 우려해 죽였다.
45년8월20일 "모리시타 야스오"(군인)와 "다이쓰끼"(당시 36세)가
내게로 와 학살대를 조직하자고 제의, 협력키로 약속했다.
조선인들을 죽이기로 한 이날 당일로 "다이스끼"가 "모리시타"집으로
안면이 없는 조선인 1명을 데려온 후 "그 조선인이 자기집에서 도둑질을
하려 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를 죽이기로 하고 그를 밖으로 끌어내 모리시타 집에서 1km
떨어진 곳으로 끌고갔다.
"다이스끼"가 그를 처음 혁대로 때리기 시작했고 그다음 모리시타가
일본도로 쑤셔 죽였으며 나는 그 조선인에게서 2백15엔을 빼았았다.
그리고 조선인 시체를 길에서 2백m 떨어진 풀숲에 던져놓고
"모리시타"집으로 되돌아 왔다.
21일 아침 모리시타집에 다시 모여 의논한 끝에 더 많은 일본인을
학살에 동원하기로 결정, "구리야마"집으로 함께 갔다.
마침 "구리야마"집에는 "가꾸다"(42세)가 있었다.
"모리시타"는 이들에게 "조선인들이 우리를 배반하고 소련군을 반갑게
맞이 하고 있다"면서 전날 결정한 학살계획을 설명하고 우리가 조직한
학살대에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들은 곧 승락했다.
이들과 이야기 한 뒤 우리는 몇명의 일본인을 더 동원시키기로 했다.
이를위해 나와 "모리시타"는 일본집을 돌아다니며 "스즈끼 마사요시"
"가가이 고타로" "시바마사시"(42)를 더 불러모아 모두 9명이 모였다.
9명이 "구리야마"집에 모여 회의를 갖고 모인 목적.배경.학살계획등을
설명했으며 모두 학살에 동의했다.
회의가 진행되는동안 때마침 3명의 조선인이 왔다. 우리는 즉시 이들을
죽이기로 했다. "나츠가와"라는 이름의 조선인을 "가꾸다"가 일본도로
찌르니 그가 배를 웅크리고 달아났다. 그를 모리시타가 쫓아가서 죽였다.
나머지 2명중 1명의 조선인은 놀라 도망갔다. 그를 나와 "나가이
고타로"가 뒤쫓아가 일본도로 내리쳐 베어버린후 3명의 시체를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끌고가 땅을 파고 던져버렸다. 3번째 조선인은 "시바
마사시"가 사냥총으로 쏘아 죽였다.
3명을 죽인후 우리는 "마루야마"란 일본 이름을 가진 조선인 집으로
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학살사건을 은폐시키기 위해 죽여야했다.
"마루야마"집에 가는도중 또 한명의 조선사람을 만났다. 먼저 혁대로
때리다 내가 그를 일본도로 몇번 내리쳤다.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나가이 고타로"가 숨이 멈출때까지 찔렀다.
그리고 나서 "마루야마"조선인집에 오니 마루야마와 부인, 그리고
12살가량의 딸, 조선인 34명이 있었다.
우리들은 조선여자에게 "일본인도 피난을 가니 딸을 데리고 산속에
숨어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조선남자들에게는 "구리야마"집으로 가라고
했다. 이들은 이말을 믿고 그렇게 했다.
그 뒤 우리는 조선남자들을 뒤쫓아가며 누가 누구를 죽일 것인가를
결정, 조금후 죽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시체는 길에서 멀지않은 구덩이에
던진후 풀로 덮었다. 나는 그뒤 옆마을에도 죽일 조선인들이 있는지를
알기위해 그곳에 갔다. 가는길에 또 한사람의 일본인을 만났다.
그에게 조선인들을 죽여야 한다고 하니 "옳다"고 했다. 그는
자기마을에서도 조선인을 죽일테니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도와준다고 약속했다. 그 길로 "구리야마"집으로 가 그의 부탁을
전달했다. 그리고 다시 옆마을로 가 지원해주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다.
우리는 "나가이 아끼오"집에 모이기로 했다.
22일 아침 약속된 집에 가보니 15~16명의 일본인이 이미 와 있었다.
우리는 조선인 숙소로 향했다. 도중에 5명이 더 합류했다.
조선인 숙소에 도착하기전 우리는 정찰을 하며 동태를 살폈다.
한명의 조선인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두 패로 나뉘어 포위해
들어갔다.
숙소앞에 이르자 "모리시타"가 "앞으로"하고 지시했다.
그러자 조선인 한명이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를 일본도로 쳐 죽였다.
한사람을 더 죽인 후 숙소안에 들어가보니 거기에는 1명의 조선남자,
다리부상을 입은 조선인 여자가 누워있었고 다른 한 여자는 5명의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조선인 남자를 밖으로 끌어내 일본도로 쳐 죽였다.
다리에 부상을 입은 여자도 끌고 나와 죽였다.
27명을 집단학살한 사건의 전모가 소상히 기록돼 있는 자료가 발견됐다.
이 자료는 1945년 8월20일부터 23일까지 4일간 홈스크동쪽
파잘스키마을에서 일본인들이 자행한 조선인 집단살륙사건에 대한
소련당국의 조사내용, 학살된 조선인들의 시체검안결과, 재판기록 등이
요약.정리된 것으로 그동안 소련정보기관이 `대외비문서''로 분류,보관해
오던 것이다.
관련사진과 함께 입수된 이 자료에는 당시 일본인들의 집단학살
모의단계서부터 살륙과정, 방법등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기간중 강제징용.징병.정신대 등으로 끌고간
조선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각종 만행의 전모가 기록에 의해 생생하게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다음은 이 자료 가운데 학살을 자행한 일본인이 군사재판에서 진술한
학살진상을 간추린 내용이다.
<>호소가와 히로시(당시 26세. 처형됨. 학살조직자)
"당시 일본인들은 사할린 여러마을에서 조선인들이 붉은군대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지원해주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 일본인들은 붉은
군대가 우리마을에 들어오면 조선인들이 소련군에 가담, 일본인을 원수로
여길 것을 우려해 죽였다.
45년8월20일 "모리시타 야스오"(군인)와 "다이쓰끼"(당시 36세)가
내게로 와 학살대를 조직하자고 제의, 협력키로 약속했다.
조선인들을 죽이기로 한 이날 당일로 "다이스끼"가 "모리시타"집으로
안면이 없는 조선인 1명을 데려온 후 "그 조선인이 자기집에서 도둑질을
하려 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를 죽이기로 하고 그를 밖으로 끌어내 모리시타 집에서 1km
떨어진 곳으로 끌고갔다.
"다이스끼"가 그를 처음 혁대로 때리기 시작했고 그다음 모리시타가
일본도로 쑤셔 죽였으며 나는 그 조선인에게서 2백15엔을 빼았았다.
그리고 조선인 시체를 길에서 2백m 떨어진 풀숲에 던져놓고
"모리시타"집으로 되돌아 왔다.
21일 아침 모리시타집에 다시 모여 의논한 끝에 더 많은 일본인을
학살에 동원하기로 결정, "구리야마"집으로 함께 갔다.
마침 "구리야마"집에는 "가꾸다"(42세)가 있었다.
"모리시타"는 이들에게 "조선인들이 우리를 배반하고 소련군을 반갑게
맞이 하고 있다"면서 전날 결정한 학살계획을 설명하고 우리가 조직한
학살대에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들은 곧 승락했다.
이들과 이야기 한 뒤 우리는 몇명의 일본인을 더 동원시키기로 했다.
이를위해 나와 "모리시타"는 일본집을 돌아다니며 "스즈끼 마사요시"
"가가이 고타로" "시바마사시"(42)를 더 불러모아 모두 9명이 모였다.
9명이 "구리야마"집에 모여 회의를 갖고 모인 목적.배경.학살계획등을
설명했으며 모두 학살에 동의했다.
회의가 진행되는동안 때마침 3명의 조선인이 왔다. 우리는 즉시 이들을
죽이기로 했다. "나츠가와"라는 이름의 조선인을 "가꾸다"가 일본도로
찌르니 그가 배를 웅크리고 달아났다. 그를 모리시타가 쫓아가서 죽였다.
나머지 2명중 1명의 조선인은 놀라 도망갔다. 그를 나와 "나가이
고타로"가 뒤쫓아가 일본도로 내리쳐 베어버린후 3명의 시체를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끌고가 땅을 파고 던져버렸다. 3번째 조선인은 "시바
마사시"가 사냥총으로 쏘아 죽였다.
3명을 죽인후 우리는 "마루야마"란 일본 이름을 가진 조선인 집으로
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학살사건을 은폐시키기 위해 죽여야했다.
"마루야마"집에 가는도중 또 한명의 조선사람을 만났다. 먼저 혁대로
때리다 내가 그를 일본도로 몇번 내리쳤다.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나가이 고타로"가 숨이 멈출때까지 찔렀다.
그리고 나서 "마루야마"조선인집에 오니 마루야마와 부인, 그리고
12살가량의 딸, 조선인 34명이 있었다.
우리들은 조선여자에게 "일본인도 피난을 가니 딸을 데리고 산속에
숨어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조선남자들에게는 "구리야마"집으로 가라고
했다. 이들은 이말을 믿고 그렇게 했다.
그 뒤 우리는 조선남자들을 뒤쫓아가며 누가 누구를 죽일 것인가를
결정, 조금후 죽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시체는 길에서 멀지않은 구덩이에
던진후 풀로 덮었다. 나는 그뒤 옆마을에도 죽일 조선인들이 있는지를
알기위해 그곳에 갔다. 가는길에 또 한사람의 일본인을 만났다.
그에게 조선인들을 죽여야 한다고 하니 "옳다"고 했다. 그는
자기마을에서도 조선인을 죽일테니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도와준다고 약속했다. 그 길로 "구리야마"집으로 가 그의 부탁을
전달했다. 그리고 다시 옆마을로 가 지원해주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다.
우리는 "나가이 아끼오"집에 모이기로 했다.
22일 아침 약속된 집에 가보니 15~16명의 일본인이 이미 와 있었다.
우리는 조선인 숙소로 향했다. 도중에 5명이 더 합류했다.
조선인 숙소에 도착하기전 우리는 정찰을 하며 동태를 살폈다.
한명의 조선인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두 패로 나뉘어 포위해
들어갔다.
숙소앞에 이르자 "모리시타"가 "앞으로"하고 지시했다.
그러자 조선인 한명이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를 일본도로 쳐 죽였다.
한사람을 더 죽인 후 숙소안에 들어가보니 거기에는 1명의 조선남자,
다리부상을 입은 조선인 여자가 누워있었고 다른 한 여자는 5명의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조선인 남자를 밖으로 끌어내 일본도로 쳐 죽였다.
다리에 부상을 입은 여자도 끌고 나와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