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사할린이산가족 80명이 22일하오 1시30분(현지시간) 소련 유지노
사할린스크공항에서 50여년의 생이별 끝에 이곳 사할린 혈육들과 재회의
감격을 나눴다.
******* 5백여 현지혈육 만난 순간 울음바다 *********
보잉 727 대한항공 특별전세기 편으로 김포공항을 출발한지
3시간20분만에 "유배의 섬" 사할린에 도착한 이들은 통관을 마치고
입국장을 빠져나오자마자 공항청 사앞을 가득 메운채 초조히 상봉을
기다리던 5백여명의 사할린가족들을 부둥켜 안고 오열, 공항주변이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변했다.
이날 혈육상봉이 이루어진 공항 곳곳에는 얼굴조차 기억해 낼 수 없는
아버지를 부여잡고 말을 잇지 못하는 유복녀의 통곡과 반세기만에 마주한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끝내 주저앉아버린 부부의 한숨, 그리고 이미
불귀의객이 돼버린 남편과 부모 형제의 유골을 찾으러 온 국내가족들의
흐느낌으로 뒤범벅이 됐다.
강제징용, 정신대등으로 끌려가 혹사당하다 해방후 일본의 반인도적
처사로 버림받은 뒤 귀국길이 막혀 지금껏 생이별을 강요당해온 이들
사할린 이산가족들이 짓이겨온 한과 아픔의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해방3년전 징용간 형님의 피붙이와 상봉한 장문교씨(51.무직.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쌍정리 209의1)는 공항에 마중나온 장성미씨(32)등 조카딸
가족 4명을 얼싸안 은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장씨는 "지난해 비로소 사할린에 형님하고 같이 징용을 갔던분 한테
형님은 돌아가시고 형님의 피붙이가 사할린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조카들의 얼굴을 맞부비며 통곡했다.
********* "아버지 유해 찾을 수 있을지..."눈물도 *********
지난 63년 신문보도를 통해 아버지가 사할린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유해를 찾기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지난해 함께 징용간 아버지
고향친구의 초청으로 사할린을 방문한 양향철씨(59.대경제지공업사 전무.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189의 3 효성아파트 B동 502호)는 "아버지
(병기씨)가 징용간 직후 보내온 사진과 주소하 나만을 들고 유해를 찾으러
왔으나 과연 유해가 묻혀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지 모 르겠다"며 다른
가족들의 상봉장면을 부러운듯 바라보다 눈물을 닦아냈다.
또 46년만에 처음으로 동생을 만난 유달균씨(76.대구시 달서구 송현동
798의73)는 공항에 마중나온 동생 영균(74)씨의 왼쪽다리가 절단된 모습을
보고 그만 땅바닥에 주저 앉은채 넋 잃은 표정을 지었다.
이날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인 1943년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아버지
이상민씨(70. 유지노 사할린스크거주)와 감격의 상봉을 한 유복녀
이외연씨(47.대구시 동구 신암 4동 649의20)부부는 아버지 이씨의 손을 꼭
잡은 채 말을 잇지 못하다 "아버님의 7순잔치를 해드리려고 왔다"며 끝내
오열했다.
또 20여년간의 수소문끝에 징용간 아버지가 사할린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 평생의 소원이던 성묘를 위해 사할린을 찾은
이영주씨(48.경찰공무원.광주시 동구 산수3동 11의1 동산로얄아파트
12동202호)는 아버지 이길수씨(83년 작고)와 이복동생의 모습이 담긴
빗바랜 사진을 가슴에 걸고 걸어나오는 자신을 알아보고 달려온 이복동생
가족들을 부둥켜 안은채 마냥 눈물만 흘렸다.
"아버지"하고 불러보는게 소원이었다는 이씨는 "아버지가 지난 43년
10월 내가 태어난지 1주일만에 징용으로 끌려간 뒤 생사도 모르고 있다가
작년 4월에 KBS 이산가족방송을 들은 아버님 친구로부터 사할린에서
연락이와 이곳을 찾게 됐다" 면서 "이제 아버님 산소를 찾아 성묘하고
이복동생들과 상의, 유골봉환이 어려우면 한줌의 흙이라도 거두어
고향선산에 모셔져 있는 어머님과 합장토록 하겠다"며 흐느꼈다.
중소이산가족회(회장 이두훈)주선으로 국내 가족들이 각자 비용을
추렴, 서울-사할린간 직항전세기를 마련해 상봉의 기회를 가진 이들은
다음달 2일까지 12일동안 사할린에 살고있는 가족집에 머물면서
부모형제들의 묘를 찾아 성묘하거나 영주귀국 문제등을 협의하며 일부는
유골을 직접 수습해 귀국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