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사회주의선전 강화..."동구변화따른 위기감서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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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광주민주화운동
= 광주민주화운동의 발생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며, 김대중씨의
체포와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보십니까.
= 현지 지휘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주지역에 7공수에 이어 11공수
3공수부대가 파견됐고, 그래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20사단까지
파견됐습니다. 이같은 증파결정을 누가했으며 증인은 증파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읍니까.
*** 20사단 파견 누가 결정했나 ***
= 80년 6월 육본과 보안사는 광주사태의 원인이 김대중 추종세력과 재경
호남출신 문제학생과 깡패들이 합세, 민심을 선동하고 조직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공표했고, 전교사는 공수병력이 시위군중을 해산
보다는 체포위주로 과잉진압했기 때문에 시민의 감정을 폭발시켰다고
분석했는데 어는 것이 더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시위진압과정에서 정웅 31사단장은 "경찰만으로 진압할 수 있다.
군출동이 불필요하다"고 건의했으나 현지 계엄사령관의 판단은 무시되고
19일 11공수여단이 광주에 추가로 증파됐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증인이 판단하기에 시위진압의 실질적 책임자는 누구라고 생각
하십니까.
*** 시위진압 실질책임자 누군가 ***
=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을 31사단장과 윤흥정 전교사사령관은 보고받지
못하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지시는 세밀한 명령형 명령이었다고 하는데
증인은 이 공수부대의 실질적 지휘관이 누구였다고 생각하십니까.
= 5월 20일 시민과 진압군 사잉에 과격한 충돌도 없었는데 그날 하오
3시쯤부터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돌아갔다.
이때 7여단 CP에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와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정사령관의 방문시간에 진압방식의 변화가 온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31사단장은 이후 공수부대에대한 작전통제권은 형식적인 것이고
질적으로 공수부대에 대한 어떤 지휘도 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증언에 동의하십니까.
= 많은 국민과 광주시민들이 광주사태의 최고책임자는 증인이며,
공수부대의 지휘책임자는 정호용당시 특전사령관이라고 하는데 이 견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지휘책임자 정호용씨 아니었나 ***
= 5 월 24일 광주에 들어가 학생/시민들의 시위를 무장폭동으로 유도하고
반정부 선전및 선동임무를 띠고 남파된 간첩 이장용을 서울에서 검거했고
계엄군이 접수한 광주시내에서 5월 25일 장계범의 독침사건이 있었는데
88년 내무부 국정감사와 광주특위 청문회에서도 조작극이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사건을 조작했으며 사실여부를 밝혀주기 바랍니다.
= 5월 21일 12시쯤 광주도청 앞에서 시위군중과 계엄군간의 정면대치
상황에서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됐습니다.
증인은 집단발포상황을 언제, 누구로부터 보고받았습니까.
그후 증인은 누구에게 보고했으며 어떻게 조치했습니까.
= 5 월 27일 최종 도청진압작전 수립과정에 증인이 관여했습니까.
도청진압작전으로 희생된 시민이 미국정부의 답변에 의하면 30명이고
군관련자료에 의하면 17명인데 어느 것이 맞는 것입니까.
*** 신군부의 정권 찬탈 음모 아닌가 ***
= 광주특위의 질의에 대한 공식답변에서 미정부는 12.12사태, 비상계엄
확대, 광주사태등의 책임을 전적으로 신군부세력의 권력야욕에 의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그 증거로서 수차례에 걸쳐 12.12 사태 이후의
제반사건들에 관해 증인에게 직접불쾌감을 표시, 항의/경고를 한 바 있으나
증인은 전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미국은 이러한 자신들의 입장을
한국국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으나 보도매체의
철저한 통제로 불가능했다고 주장하는데 이와같은 미정부의 답변내용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보도매체에 대한 통제는 증인이 한 것입니까.
= 특히 "전씨가 정권을 장악한데 대하여 미국이 냉담하고 공공연하게
불쾌해하는 것은 세계에 알려져 있으나 한국 국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정권은 전면계엄령하에 보도매체를 장악해 미국의 입장을 왜곡시키고
미국이 그들을 지지하는 것 처럼 묘사하는데 이를 이용했다는 미정부의
답변내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국보위 설치등
= 국보위 설치의 최초 논의지점, 제안자의 국보위설치 설치 경위와
설지목적은 무엇이며 사실상의 입법기관인 국보위를 설치한 것은
위헌이라는 주장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 국보위설치계획은 광주민주화운동기간주에 구체적으로 수립
되었는데 이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위기상황을 조성하고 비상대책기구의
설치당위성을 인식시킨후 국보위를 설립해 국회기능과 행정부기능을
통합/장악하는 계기로 삼은것으로 보는 주장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 국보위설치가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이 마무리된
80년 5월 27일이며 국보위의 실질적인 최고책임자인 상임위원장직을
증인이 맡은 의도는 무엇입니까.
= 국보위의 실질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상임위의 조직구성은 정부부처의
구성과 비슷한 분과위를 두었는데 이러한 조직구성을 의도한 것은
형식적인 정부를 온존시킨채 실질적으로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기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 국보위설치이후 증인에게 모든 권한과 책임이 부여되어 있었고
최대통령은 형식적으로 재가만 한것으로 보는 견해는 사실입니까.
최대통령은 스스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증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맡겼습니까.
= 광주민주화운동의 발생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며, 김대중씨의
체포와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보십니까.
= 현지 지휘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주지역에 7공수에 이어 11공수
3공수부대가 파견됐고, 그래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20사단까지
파견됐습니다. 이같은 증파결정을 누가했으며 증인은 증파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읍니까.
*** 20사단 파견 누가 결정했나 ***
= 80년 6월 육본과 보안사는 광주사태의 원인이 김대중 추종세력과 재경
호남출신 문제학생과 깡패들이 합세, 민심을 선동하고 조직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공표했고, 전교사는 공수병력이 시위군중을 해산
보다는 체포위주로 과잉진압했기 때문에 시민의 감정을 폭발시켰다고
분석했는데 어는 것이 더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시위진압과정에서 정웅 31사단장은 "경찰만으로 진압할 수 있다.
군출동이 불필요하다"고 건의했으나 현지 계엄사령관의 판단은 무시되고
19일 11공수여단이 광주에 추가로 증파됐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증인이 판단하기에 시위진압의 실질적 책임자는 누구라고 생각
하십니까.
*** 시위진압 실질책임자 누군가 ***
=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을 31사단장과 윤흥정 전교사사령관은 보고받지
못하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지시는 세밀한 명령형 명령이었다고 하는데
증인은 이 공수부대의 실질적 지휘관이 누구였다고 생각하십니까.
= 5월 20일 시민과 진압군 사잉에 과격한 충돌도 없었는데 그날 하오
3시쯤부터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돌아갔다.
이때 7여단 CP에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와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정사령관의 방문시간에 진압방식의 변화가 온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31사단장은 이후 공수부대에대한 작전통제권은 형식적인 것이고
질적으로 공수부대에 대한 어떤 지휘도 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증언에 동의하십니까.
= 많은 국민과 광주시민들이 광주사태의 최고책임자는 증인이며,
공수부대의 지휘책임자는 정호용당시 특전사령관이라고 하는데 이 견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지휘책임자 정호용씨 아니었나 ***
= 5 월 24일 광주에 들어가 학생/시민들의 시위를 무장폭동으로 유도하고
반정부 선전및 선동임무를 띠고 남파된 간첩 이장용을 서울에서 검거했고
계엄군이 접수한 광주시내에서 5월 25일 장계범의 독침사건이 있었는데
88년 내무부 국정감사와 광주특위 청문회에서도 조작극이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사건을 조작했으며 사실여부를 밝혀주기 바랍니다.
= 5월 21일 12시쯤 광주도청 앞에서 시위군중과 계엄군간의 정면대치
상황에서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됐습니다.
증인은 집단발포상황을 언제, 누구로부터 보고받았습니까.
그후 증인은 누구에게 보고했으며 어떻게 조치했습니까.
= 5 월 27일 최종 도청진압작전 수립과정에 증인이 관여했습니까.
도청진압작전으로 희생된 시민이 미국정부의 답변에 의하면 30명이고
군관련자료에 의하면 17명인데 어느 것이 맞는 것입니까.
*** 신군부의 정권 찬탈 음모 아닌가 ***
= 광주특위의 질의에 대한 공식답변에서 미정부는 12.12사태, 비상계엄
확대, 광주사태등의 책임을 전적으로 신군부세력의 권력야욕에 의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그 증거로서 수차례에 걸쳐 12.12 사태 이후의
제반사건들에 관해 증인에게 직접불쾌감을 표시, 항의/경고를 한 바 있으나
증인은 전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미국은 이러한 자신들의 입장을
한국국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으나 보도매체의
철저한 통제로 불가능했다고 주장하는데 이와같은 미정부의 답변내용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보도매체에 대한 통제는 증인이 한 것입니까.
= 특히 "전씨가 정권을 장악한데 대하여 미국이 냉담하고 공공연하게
불쾌해하는 것은 세계에 알려져 있으나 한국 국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정권은 전면계엄령하에 보도매체를 장악해 미국의 입장을 왜곡시키고
미국이 그들을 지지하는 것 처럼 묘사하는데 이를 이용했다는 미정부의
답변내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국보위 설치등
= 국보위 설치의 최초 논의지점, 제안자의 국보위설치 설치 경위와
설지목적은 무엇이며 사실상의 입법기관인 국보위를 설치한 것은
위헌이라는 주장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 국보위설치계획은 광주민주화운동기간주에 구체적으로 수립
되었는데 이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위기상황을 조성하고 비상대책기구의
설치당위성을 인식시킨후 국보위를 설립해 국회기능과 행정부기능을
통합/장악하는 계기로 삼은것으로 보는 주장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 국보위설치가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이 마무리된
80년 5월 27일이며 국보위의 실질적인 최고책임자인 상임위원장직을
증인이 맡은 의도는 무엇입니까.
= 국보위의 실질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상임위의 조직구성은 정부부처의
구성과 비슷한 분과위를 두었는데 이러한 조직구성을 의도한 것은
형식적인 정부를 온존시킨채 실질적으로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기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 국보위설치이후 증인에게 모든 권한과 책임이 부여되어 있었고
최대통령은 형식적으로 재가만 한것으로 보는 견해는 사실입니까.
최대통령은 스스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증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맡겼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