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빛과 바람 사이에서 조성진의 잔향을 담는 일

[arte] 구본숙의 Behind the Scenes

피아니스트 조성진
2024년 10월 통영에서 조성진을 만났다.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린 콘서트 <조성진과 친구들>이 있는 날이었다.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연주자이기에 그의 연주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공식 촬영은 리허설만 허가된 상황이었고, 스탠포드 호텔과 음악당 사이의 길목에서 그와 마주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 그는 예전처럼 잔잔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 짧은 웃음 하나가 오래된 기억을 단번에 불러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 사진. ©구본숙
초등학생 시절의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조용한 말 몇 마디와 함께 잔잔한 웃음으로 늘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기억은 소란스럽지 않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도 마음속에서 은은히 울린다. 그가 세계적인 연주자가 되어 더 이상 가까이서 보기 어려워진 지금, 그때의 기억은 마치 향기처럼 시간의 틈새에 머물며 천천히 쌓여왔다.

내가 처음 통영을 찾은 것은 2004년이었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물로바(Viktoria Mullova)와 계몽시대 오케스트라(OAE)의 내한 공연을 촬영하러 갔던 때이다. 당시는 아직 통영국제음악당이 개관하지 않은 때여서 이 공연은 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모차르트의 작품으로만 꾸며진 무대였다. 아직 필름으로 사진을 찍던 시절이라 그 흑백의 질감 속에 남은 음악의 여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로 통영은 나에게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갈 때마다 ‘이번엔 어디를 가 볼까’ 하는 설렘으로 리스트를 만들고 하나씩 방문하며 나만의 지도를 완성해갔다. 그렇게 오랜 세월 통영을 오가다 보니 이제는 도시의 공기와 바다의 냄새까지 익숙해졌다.

작곡가 윤이상(1917~1995)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통영국제음악당은 2013년 개관한 이래 이제는 통영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선 그 건물은 마치 하나의 악기처럼 빛과 바람, 음악을 품고 있다. 인터미션 때 바다를 볼 수 있는 곳, 정말 최고다. 듣기로는 이곳을 찾는 외국 음악가들도 대기실에서 내다보이는 바다 풍경을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통영국제음악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를 비롯한 세계적인 공연들이 이어지고 있다. 통영국제음악당에 갈 때마다 마음은 늘 설레고 다시금 평화로워진다. 그곳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라 음악과 기억이 교차하는 나의 시간의 집이다. 그리고 작년 가을 그 집의 문 앞에서 다시 만난 조성진의 미소는 오래된 기억에 새로운 향기를 더해주었다.
리허설 때 파란 스웨터를 입고 활짝 웃는 조성진의 모습을 보니 문득 가슴이 두근거렸다. 친구들과 함께 있어 편안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음악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은 인상 깊었다. 그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연주를 들으니 그가 한층 더 단단해지고 강인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언제나 여운이 남는 사람을 좋아한다. 스쳐 간 자리마다 향기가 남고 그 향기가 다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사람. 조성진은 내 기억 속에서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계속 울리는 잔향(殘響) 같은 존재. 그의 연주를 마주할 때면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졌던 기억이 다시 피어오르는 장면을 본다. 그 순간 음악은 소리가 아니라 빛이 되고, 나는 그 빛을 따라 사진이라는 언어로 기억을 다시 붙잡는다.

예전에는 클래식 연주자들이 콩쿠르에서 수상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접하곤 했다. 그러나 2005년 유튜브라는 매체가 등장하면서 음악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았다. CD를 사서 듣거나 클래식 라디오 방송에서 접했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유튜브 검색창에 연주자 이름과 곡명만 치면 즉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이 쉬워졌고, 이제 우리는 소리를 눈으로도 느끼는 시대를 맞이했다.

음악뿐 아니라 모든 정보에 대한 소식이 빠르고 자세히 전달되는 상황 속에서 2015년 조성진이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 역시 빠르게 퍼져나갔다. 결선에서 심사위원 17명 가운데 1명에게서 최저점인 1점을 받았으나 14명으로부터 10점 만점에 9∼10점을 받아 우승했다. 당혹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결국 1등을 쥐어진 심사 결과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그는 단번에 슈퍼 아티스트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K-classic 아이돌로 표현되기도 하면서 열정적인 팬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덩달아 클래식에 대한 관심도가 급증했다. 그럴 때마다 화면을 연일 장식한 것은 조용하고 새하얀 얼굴과 긴 손가락의 청년, 조성진의 얼굴이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 사진. ©구본숙
그리고 조성진은 2023년 11월 한국인 최초로 베를린필의 상주 음악가(Artist in Residence)로 임명되었다. 2024~2025년 시즌 동안 베를린 필과 협연은 물론 독주회와 자신이 직접 기획한 프로그램을 통해 폭넓은 음악 세계를 선보이게 된다. 2017년 협연자였던 피아니스트 랑랑의 대타로 베를린필과 처음 호흡을 맞췄던 그는 이제 자신만의 음악적 언어로 무대를 이끄는 성숙한 예술가로 성장했다. 조성진에게 이번 상주 음악가 활동은 단순한 경력의 이정표가 아니라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시대를 써 내려가는 새로운 서장의 시작처럼 느껴진다.

수상 이후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는 언제나 무겁게 그를 따라다녔을 것이고, 무대 위 화려함의 이면에는 끝없이 반복되는 연습과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내적 고독이 자리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젠 조성진은 단순한 연주자가 아니라 기대와 현실, 자신과 세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기회가 주어지면 눈부신 조명 아래 무대 위 말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의 고독과 사유, 연주와 삶의 균열이 스며 있는 순간을 사진으로 붙잡고 싶다.

사람들의 찬사는 바람과 같아서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새로운 존재를 향해 흐른다. 환호는 한 대상에게 영속적으로 남지 않고 항상 다른 새로운 자극을 찾아 떠난다. 인간이 그렇고 무상한 세상사가 그렇다. 그렇기에 또 다른 스타의 등장과 새로운 기대는 호기심과 성취 욕구가 작동한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하다. 조성진은 아마 자신에게 묻지 않았을까? ‘나는 언제까지 연주를 할 수 있을까, 이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화려함과 성취 뒤에는 언젠가 마주하게 될 한계와 불안,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분명 숨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질문과 고민의 흔적까지도 앞으로 지켜보고 싶다. 계속해서 자신만의 음악을 찾아가는 존재의 모습까지. 그의 음악적 여정뿐 아니라 그가 마주하게 될 긴 시간의 내적 삶까지 상상해보게 된다. 그 모습은 나에게 언제나 궁금증과 동시에 깊은 관심을 준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 사진. ©구본숙
사진 속 음악가들은 연주하는 인간이 아니라 음악이 인간의 형상을 빌려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는 조성진을 피아니스트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내게 음악과 시간, 그리고 기억이 교차하는 한 존재이다. 무대 위에서 흐르는 그의 음악은 단지 소리가 아니라 빛으로 번지고, 그 빛은 다시 사진 속에 머문다. 그가 연주를 멈춘 순간에도 손끝에 남은 미세한 떨림과 숨결의 여운을 포착하고 싶다. 그 고요한 틈에서 음악은 여전히 살아 있고 그곳에서 나는 인간 조성진을 마주한다.

사진은 언뜻 멈춘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흐름이 있다. 음악이 공기를 흔드는 것처럼 사진은 시간의 결을 흔든다. 나는 그 흔들림 속에서 그의 고독과 집중 그리고 사유의 온도를 본다. 결국 조성진의 얼굴을 찍고 싶다기보다 그의 음악이 남긴 흔적을 찍고 싶어진다. 빛이 손끝을 스치며 만들어내는 짧은 선율 그 잔향이 남아 있는 공간. 그곳이 내가 사진을 통해 머무르고 싶은 자리다.

내가 바라는 사진은 그의 존재가 음악으로 변해 공기 속에 흩어지는 빛의 흔적을 담는 일이다. 나는 그 흔적을 따라가며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를 소리의 기억을 붙잡는다. 조성진은 내게 한 사람의 연주자이자 시간 속에서 빛으로 변주되는 하나의 장면이다. 그리고 나는 그 장면을 사진이라는 언어로 조용히, 오래도록 기록하고 싶다.

구본숙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