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시간 [나태주의 인생 일기]

나태주 시인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나는 아이를 둘 두었다. 아들 하나에 딸 하나. 아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 일찍이 이과 계열을 선택했기에 딸이 대학에 갈 때 나는 문과를 원했다. 더불어 글 쓰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다. 다행히 딸아이가 문과를 지망했고 나의 소망대로 글 쓰는 사람이 되어주어서 나는 더 이상 딸아이에게 바랄 것이 없는 심정이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노력형인 딸아이는 서울대 학부와 박사 과정을 거쳐 지금은 그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열아홉에 집을 떠나 서울에 살며 서울대를 한 번도 떠나보지 않고 산 사람이다. 부모로서 나는 그것만으로도 고맙고 딸아이가 나에게 할 효도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여긴 고치…나비가 되어서 나오렴"

감사하게도 딸아이는 대학에 다니면서 좋은 선생님들에게 글 쓰는 방법을 배워 문학 평론가로 등단했고 동아일보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이란 고정 코너를 500회 이상 연재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나오는 코너이므로 10년이 넘는 매우 끈질긴 연재물이다. 그럴뿐더러 딸아이는 요즘 책을 여러 권 출간해 베스트셀러 저자가 되었고, 그를 기반으로 대중 강연 자리에 자주 초청되어 나가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딸아이와 잘 만나지 않고 전화 통화도 자주 하지 않는다. 피차 바쁘고 번거로운 삶을 사는 데 방해될까 봐 그러는 것이다. 그 대신 인터넷을 자주 열어보면서 딸아이 근황을 살핀다. 뉴스, 카페, 블로그에 뜨문뜨문 소식이 나와 있는 것이다. 아마 그건 딸아이도 마찬가지일 테다.

며칠 전 누군가의 블로그를 열어 살폈을 때다. 딸아이 강의를 유튜브를 통해 보았다는 소감이 한 편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내 얘기가 끼어 있었다. ‘어젠 나민애 님의 글을 보게 되었는데~ 아버지인 나태주 시인께서 딸에게 자그마한 방을 마련해줬을 때 저런 말을 해주셨다고 해요. “여기는 고치야. 너는 나비가 되어서 나올 거야.” 내 부모가 나에게 하는 말처럼 울림이 있는 말로 느껴져 코끝이 엄청 시리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더랍니다.’

내가 정말 그랬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것은 내 나이 46세 때, 1991년 8월의 일. 민애가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이다. 16평짜리 낡은 단독주택에 살며 수세식 화장실이 없어 고생하고 신발장이 없어 불편했던 딸아이는 남들처럼 깨끗한 화장실과 하얀 신발장을 많이도 부러워했다. 그러다가 32평짜리 아파트로 이사 온 뒤 방이 세 개나 생겨 그 가운데 하나가 딸아이 차지로 돌아갔다.

아마도 그때 내가 제 방이 생겨 좋아하는 딸아이에게 고치와 나비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새로 방이 생겼으니 그 방에서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지 싶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던 나는 인터넷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딸아이 독자의 글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알과 애벌레 시절이 있었기에…

그래,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가? 내가 잊었던 일이 딸아이에게 고스란히 남겨지고, 또 그 사연이 낯선 독자의 글로 해서 나에게 소환된 게 새삼스럽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래,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지. 딸아이는 그 방에서 초등학교 1년 반과 중등학교 6년을 고스란히 보내고 고치에서 나비로 변하여 제가 바라던 대로 서울로 떠나갔지.

그뿐만이 아니다. 딸아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금 여러 차례 고치가 되었다가 나비가 되는 것을 반복하며 성장과 변화를 거듭했다. 대학 우등 졸업, 대학원 석·박사 과정, 결혼과 출산과 육아와 강의, 박사 학위와 함께 서울대 학부 과정 교수, 나아가 문학 평론 활동과 문학 강연, 방송 출연 등 정말로 훨훨 나비가 되어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는 모양새다. 승어부(勝於父)란 말이 일찍이 있었지만 이제 민애는 저술 활동이나 강연 활동이나 아비인 나를 훨씬 앞질러 저만큼 나가고 있음을 본다.

부모의 입장이나 바람으로서는 그렇다. 가능하면 우리 딸 민애가 더 오랫동안 나비가 되어 제 하늘을 자유롭게 날면서 보다 많은 이에게 좋은 영향력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더욱 노력하고 스스로 가다듬는 자중과 근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곤충의 일생을 볼 때 나비의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다. 그러나 나비의 시간은 더없이 아름답고 자유롭고 부러운 선망의 시간이다. 알과 애벌레와 번데기로 살던 부자유한 시간이 고스란히 나비의 시간을 위한 준비 기간이다. 특히 고치의 시간은 자신을 구속하며 사는 시간이다. 그것도 자발적 구속이다. 얼마나 답답하고 견디기 힘들겠는가. 하지만 나비의 시간을 위해 구속을 참고 견디는 것이리라.

새로운 고치와 나비로 거듭나길

나비의 시간! 얼마나 좋은 시간인가. 곤충은 비록 한 차례 짧은 나비의 시간을 보내고 그의 생을 마치게 마련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비로 살면서 한편으로는 고치로 돌아가 다음에 다시 나비가 되기 위한 준비와 노력을 계속할 수도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직렬이 아니라 병렬로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현명한 인간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하리라고 본다.

딸아이가 서울로 떠난 뒤 그 방을 내가 대신 쓰고 있다. 벌써 27년째. 생각해 보니 딸아이가 우리 집을 떠나 서울 사람으로 산 것이 27년이다. 어느새 세월이 그리 많이도 흘렀나 마음이 무거워진다. 실은 나도 딸아이가 남긴 방에서 수없이 여러 차례 고치로 살았고 나비로 몸을 바꾸며 살았다.

과연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고치가 되고 몇 번이나 나비가 될 것인가? 아니, 딸아이가 새롭게 고치가 되고 새롭게 나비가 되어 사는 것을 얼마나 여러 차례 보게 될 것인가? 부디 그 나비의 시간이 여러 차례 거듭되면서 기간이 길고 아름다우며 유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