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찬란한 미래를 외치고, 과거와 현재를 비판하는 독립영화들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결산

한국영화의 새로운 도전
서울독립영화제 2024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2024.11.28 - 12.06

영화제가 추구해야 할 덕목에서
나침반을 제시한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영화들을 아우르고 재조명
올해 50회를 맞은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가 지난 12월 6일에 폐막했다. 매해 영화제가 열리던 압구정 CGV에 더해 올해는 청담 CGV까지 상영관을 확장한 서독제는 열흘에 걸쳐 장·단편을 포함한 147편을 상영, 역대 최대 관객 수인 총 1만9575명(2023년 1만7015명)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50주년 맞아 다양한 실험 시도

50주년이라는 기념적인 해를 맞은 만큼, 영화제는 여러 가지 새로운 행사와 섹션을 시도했다. 특히 영등포 CGV의 스크린 X를 통해 공개된 개막작 <백현진쑈 문명의 끝>은 박경근 감독의 네 번째 연출작으로 일반적인 극영화가 아닌 백현진 배우의 공연을 기록 영상처럼 만들어 낸 실험적인 프로젝트다. 이후 영화제 기간에도 몇 차례 상영되었던 <백현진쑈 문명의 끝>은 영화의 파격적인 포맷, 그리고 배우 백현진의 인상적인 활약으로 관객들의 호응을 이어 나갔다.
영화 '백현진쑈 문명의 끝' 스틸컷 / 사진출처. ⓒ 서울독립영화제
언급했던 ‘실험적 시도’는 <백현진쑈 문명의 끝>에서만 보인 경향은 아니다. 올해 영화제에서는 유독 영화의 전통적인 재현 모드, 포맷과 형식을 파괴하거나 영화 언어에 도전하는 신작과 고전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독립영화 아카이브 전’을 통해 공개된 하길종 감독의 단편 <병사의 제전> (1969), 유현목 감독의 <손> (1967), 서울영화집단의 <판놀이 아리랑> (1982) (*본 세편의 영화는 하나의 회차로 묶음 상영되었다)은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갖춘 영상적 도전으로 각 시대(60년대, 70년대, 8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 아티스트들의 예술적, 정치적 코멘터리를 담는다.

특히 섹션에 속한 작품 중 하길종의 <병사의 제전>은 2019년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의 특별 상영 이후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영화의 상당 부분의 사운드와 적지 않은 양의 장면들이 유실된 상태지만 디지털 복원을 통해 필름 버전의 열악함을 완화한 ‘최선의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여전히 영화는 전위적이고 이야기의 흐름을 명확히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하지만, 감독 하길종이 영화 전반에 심어 놓은 파편적인 조각과 단서들은 1970년대 미국과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정치적인 기만과 폭력,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위부터] 영화 '손', '병사의 제전', '판놀이 아리랑' 스틸컷 / 사진출처. ⓒ 서울독립영화제
페스티벌 초이스 섹션에 속해 있는 작품 <양양> (양주연, 2024)도 다큐멘터리의 관습을 깨는 신선한 시도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자살한 고모의 자취를 추적하는 <양양>은 가족과 사회가 한 젊은 여성의 죽음을 감출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부분이 다큐멘터리 장르의 최대 필수 요소인 자료와 증거를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할 수밖에 없었음을 설명한다. 감독 양주연은 이러한 다큐멘터리 장르적 요건의 결핍을 애니메이션으로 대체한다. 영화는 고모의 전생에서 유추할 수밖에 없는 삶의 단면을 애니메이션과 문학적인 내레이션으로 전달함으로써 기존의 다큐멘터리 장르에 에세이 필름적인 접근을 혼합하고 있다.
영화 '양양' 스틸컷 / 사진출처. ⓒ 서울독립영화제
'연대'와 '차별' 이슈에 주목

형식의 전복과 실험이 올해 영화제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였다면 ‘연대’와 ‘차별’은 늘 서독제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비주류와 그들을 위한 외침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이어 올해 서울독립영화제를 통해서도 최다 수상을 기록한 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는 단연코 이러한 서독제의 독보적인 정체성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영화다. 영화는 3학년 2학기를 맞는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이자 어린 노동자, 창우의 시선을 통해 작업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폭력과 학대 그리고 수능의 응원에서 배제된 아이들을 향한 암묵적인 차별을 조명한다.

해고 노동자의 1주 일간의 휴가를 그린 그녀의 전작 <휴가>가 그랬듯, 감독 이란희의 작품은 소외된 계층을 드러내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은 이들이 ‘쟁취해야 하는’ 일상에 주목한다. 즉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당연하게 주어지거나 누리는 일상의 특권을 갖기 위해 노동자들이 얼마나 지난한 절차와 투쟁을 거쳐야 하는지의 과정을 이란희 감독은 첨예한 시선으로 포착해 신랄한 리얼리즘을 통해 전한다.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 사진출처. ⓒ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 선택 섹션에서 상영된 <파동> (이한주, 2024)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의미 있는 목소리를 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에 있어 <파동>은 앞선 작품들보다 ‘노련함’이 덜 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철도 노동자의 일상적 사투에 주목하는 이 영화의 주제적 이슈는 가볍지 않다. 영화는 서울 철도 기관사로 일하는 문영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녀는 기관사로 근무하면서 목도하게 되는 수많은 사고와 죽음으로 인해 잠식되어 가고 있다. 무력감은 우울증으로, 우울증은 마침내 죽음에 대한 충동으로, 그녀는 서서히 생의 종착역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된다.

영화의 형식은 시간 순서를 역행하거나 전복하는 형태를 취한다. 예를 들어, 영화의 전반부가 문영의 행보를 시간 순서대로 따라가며 진행이 된다면 후반부는 시간 순서를 뒤집어 그녀의 남편이 문영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재현하는 것이다. 영화는 앞서 언급했던 <3학년 2학기>가 보여주었던 사실적 리얼리즘과는 정반대의 몽환적이고도 관념적인 스케치의 형태로 노동자의 삶, 혹은 죽음에 접근한다.
영화 '파동' 스틸컷 / 사진출처. ⓒ 서울독립영화제
이 밖에도 해외 입양아의 삶을 통해 대리 입양 시스템의 허점을 경고하는 <K-Number> (조세영, 2024), 새로운 형태의 여성운동을 조명하는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 (박효선, 2024), 장애인 아동에게 모아지는 집단적 차별을 그린 <이세계소년> (김성호, 2024)의 작품들을 포함 올해 서독제에서 상영되었던 다수의 영화는 이 사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혹은 그러지 못하고 있는 문제의식과 연대를 종용하는 작품들이다.
[위부터] 영화 'K-Number',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 '이세계소년' 스틸컷 / 사진출처. ⓒ 서울독립영화제
전반적으로 올해의 서독제는 관객들과 영화인들 모두가 기대하던 성취를 보여주었다. 이는 작금의(특히 올해 개봉했던) 한국 상업영화가 도달하지 못했던 완성도를 넘어서는 작품들로도 그러하지만, 영화제가 선정한 영화들, 그리고 이 영화들을 통해 서울독립영화제가 지키고자 하는 문화적 선언과 사회적 시선으로도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제가 추구해야 할 덕목, 영화가 수호해야 할 가치, 영화 창작자들이 공유해야 할 목소리에 있어 서울독립영화제는 분명한 나침반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