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아트 렘브란트' 빌 비올라, 스승 백남준 나라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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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빌 비올라 개인전'
백남준 전시회 조수 등 거치며
비디오아트 거장 반열에 올라
물과 빛으로 삶과 죽음 등 표현
별세 이후 첫번째 한국서 전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느낌이었어요. 거기서 본 것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푸른 세상, 작은 사물들의 움직임, 한 줄기 빛….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어서 저를 구하러 물속에 뛰어든 삼촌의 손을 뿌리칠 정도였습니다.” 어린 시절 겪은 이 같은 초현실적 체험은 빌 비올라(1951~2024·사진)를 위대한 예술가로 키워낸 원동력이 됐다.
지난 7월 세상을 떠난 비올라는 삶과 죽음, 물과 빛을 주제로 명상적이고 깊이 있는 비디오아트 작품을 만들어 ‘비디오 시대의 렘브란트’라는 별명을 얻은 거장이다. 지금 서울 사간동 국제갤러리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비올라가 세상을 떠난 후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린 그의 전시인 데다, 그가 천착했던 ‘물’을 주제로 만든 의미 있는 초기작들이 여럿 나와 있어 특히 주목할 만하다.
비디오를 만난 ‘백남준의 조수’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회화나 조각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는 1970년대 백남준 등 전위예술가들을 만난 뒤 비디오아트에 눈을 떴다. 1974년 백남준이 뉴욕주 시러큐스의 에버슨 미술관에서 작품을 선보일 때 그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전시장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인포메이션’(1973)은 기술적인 오류로 잘못 녹화된 전자 신호를 담은 초기작이다. 작가는 “전자 매체라고 해도 물질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작품”이라고 했다. ‘포 송즈’(1976)는 시간의 흐름과 순환을 주제로 한 작품. ‘실제로 흐르는 시간과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다를 수 있다’는 게 주제다. 이 밖에도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1995년작 ‘인터벌’을 주목할 만하다. 두 개의 영상을 빠르게 교차하듯 상영해 관람객이 공간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한 작품이다.
하이라이트는 ‘무빙 스틸니스 : 마운틴 레이니어 1979’. 영상 작품과 이를 반사하는 물을 함께 설치한 ‘혼합 설치 작품’이다. 영상 속에서는 미국 워싱턴 주의 레이니어 산이 고요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다. 그런데 수면에 파동이 생기면 산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 덧없이 일렁거리던 산은 물결이 거칠어질수록 추상화처럼 변한다. 이 작품을 두고 생전의 작가는 말했다. “산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거대한 산의 존재조차 내 마음(산을 비추는 물)에 따라 연약하게 흔들리고 사라질 수 있다는 사유를 담았다는 의미다.
개인전에 70만 명 동원하기도
비올라는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미국관 작가로 선정되면서 미국의 ‘국가대표 작가’로 인정받았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숱하게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특이한 건 그의 작품이 미술계 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인기 만점이라는 사실이다. 2017년 빌바오 구겐하임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71만명을 끌어모으며 미술관 역사상 세 번째로 많은 관람객 수를 기록한 게 증거다. 낯선 매체를 쓰는데도 미술계와 대중에 고루 인정받는 비결에 대해 평론가들은 “비올라의 작품이 오래 전부터 예술이 다뤄온 익숙하고 근원적인 질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예컨대 이런 질문들. 삶과 죽음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죽음 후에도 우리의 존재는 계속되는지, 사람들은 그 짧은 생에서 어떻게 서로를 알고 사랑할 수 있는지. 새로운 기법과 파격적인 시도를 맨 앞에 내세우는 대부분의 미디어 아티스트들과 달리, 비올라는 이런 근원적이고 묵직한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리고 옛 미술 거장들과 정면으로 맞서고자 했다. 그가 렘브란트·카라바조 같은 거장들과 비견되는 이유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