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韓紙…베네치아 적시고 왔다

전시 전광영 개인전

2년 전 베네치아 비엔날레서
한국 작가 최다 관람객 동원한
한지 미술 작품들 대거 선보여

연작 '집합' 등 30년 활동 조망

외계인의 머리통처럼 생긴 입체 작품 ‘집합19-MA023’이 벽에 상영 중인 영상 작품 ‘존재의 영원성’과 마주 보고 있다. 흉물처럼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과 대자연을 대비했다. /가나아트 제공

아름다울 미(美) 자를 쓰지만 현대미술 작품이 꼭 예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작품 안에 담긴 의미다. 작품의 의미가 얼마나 진정성 있는지, 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는지에 따라 현대미술 작품의 가치가 결정된다.

전광영(80·사진)은 이걸 가장 잘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자신이 겪은 삶의 고난과 예술적 발전 과정, 한국 전통의 뿌리를 한데 녹인 그의 한지 미술이 국내외에서 호평받는 이유다. 2년 전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 축제에서 역대 한국 작가 관람객 중 최다인 10만여 명을 끌어모았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열리고 있는 전광영의 전시는 지난 6년간 해외 전시에만 전념하던 그의 작품을 오랜만에 국내에서 만날 기회다. 초기작부터 2년 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병행 전시에서 선보인 대규모 설치 작품, 신작까지 모두 나와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전 작가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었던 전시의 축소판 같은 미술관급 전시”라고 자평했다. 이번 전시작을 통해 그의 60년 작품 세계를 돌아봤다.

○‘한지 미술’에 이르기까지

1980년대 초 홍익대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40대 초반의 전광영은 여전히 자신만의 화풍을 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2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추상화 ‘빛’ 시리즈는 그 고민의 결과물 중 하나다.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색, 미국 유학 시절 본 추상미술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작품은 성에 차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이건 내 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더 한국적인 작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민과 방황은 그 후로도 수년간 계속됐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전국을 유랑하던 그가 불현듯 떠올린 건 어린 시절 한약방을 하던 큰아버지 댁 풍경이었다. 한약방에 주렁주렁 달려 있던 한약 봉지, 한약재를 정성스럽게 달이는 모습, 이를 끈으로 매 들고 가는 아낙네…. 그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정(情)을 발견했다. “서양은 ‘박스 문화’예요. 직육면체를 정확하게 재 차곡차곡 쌓아 유통하는 거죠. 한국은 ‘보자기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집간 딸에게 친정어머니가 싸주는 보자기. 그 속에 하나라도 더 담으려는 마음. 그 마음을 표현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한지 고서(古書)를 접어 만든 조형물을 모아 붙이는 ‘집합’ 연작이 탄생한 배경이다.

집합은 지난 30여 년간 꾸준히 모양과 색을 바꾸며 작가를 상징하는 연작으로 자리 잡았다. 전시장 1~2층에서는 1990년대 흑백 작품으로 시작해 원색을 담은 화려한 작품, 지난해 5월 미국 뉴욕 갤러리 전시에서 호평받은 시작 ‘치유’(Aggregation24-FE011)까지 다양한 집합 작품을 고루 만나볼 수 있다.

○베네치아 ‘그 전시’가 한국에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대형 설치작품이다. 평면 작업에 주력하던 전광영은 2000년대 들어 시끄럽고 번잡한 현대인의 일상, 환경 파괴 등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는 메시지를 담아 입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 나온 ‘집합001-MY057’이 그 시작이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은 그 축소판. 높이 3m, 지름 1.1m 원기둥 여섯 개를 통해 그리스 신전처럼 연출한 작품은 서양 문화의 유산을 상징한다. 작가는 “전통적인 서양 중심의 세계 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 세상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병행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이 주를 이룬다. 외계 생명체를 연상하게 하는 작품 ‘집합19-MA023’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촬영한 가로 11m, 세로 4m 미디어아트 작품과 마주 보고 있다. 압도적인 크기와 위용을 자랑하는 폭포수 모습과 대조적으로 전시장은 고요하다. 작가는 “대자연의 거대한 침묵 앞에서 흉측하게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반면 까맣게 타버린 심장 모양 작품 ‘집합15-JL038’ 앞에서는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린다. 병원에서 녹음한 환자의 심장 소리다. 불안하고 허약하지만 생명력을 이어가는 그 소리가 절망 속 희망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전시는 오는 2월 2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