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전화 한번 해볼까"…1970년대의 '낭만 해킹'
모니터만 밝게 빛나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빠른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다 "성공했어" 따위의 감탄사를 읊조리는 사람.오래전부터 영화 등 미디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고정관념에 대한 반작용일까.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이와 정반대의 모습을 가진 해커가 등장한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어떤 모습의 해커든 간에 해커를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물건은 컴퓨터다. 컴퓨터를 통해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기밀에 접근하는 등의 작업이 모두 이뤄지기 때문이다.

◆호루라기 불어 공짜로 전화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기 한참 전이던 1970년대 초에도 해킹은 있었다. 이 당시에는 컴퓨터 네트워크 대신 전화 네트워크에 침입하는 일이 유행했다. 이 같은 행위는 '프리킹(phreaking)'이라 불렸다.

훗날 조이버블스(Joybubbles)라 불린 조 인그레시아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으로 남들보다 예민한 귀를 갖고 있었다. 그가 7살이던 1957년,특정한 높이로 휘파람을 불면 전화 녹음이 중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그레시아는 통신회사 AT&T에 전화를 걸어 당시 교환기는 특정 주파수의 소리에 반응해 동작을 하게 된다는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여러 실험을 거친 끝에 인그레시아는 특정 음역대의 휘파람만으로 전화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능력을 발전시켜 1960년대 후반 그는 '휘슬러(whistler)'란 별명을 얻었다. 휘파람 소리만으로 공짜 전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그레시아는 그의 친구였던 존 드래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공군 기술자였던 드래퍼는 당시 판매됐던 '캡엔 크런치'란 시리얼 박스에 사은품으로 들어 있는 장난감 호루라기로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호루라기는 정확하게 2600㎐(헤르츠)의 소리를 냈다. 2600㎐ 소리는 AT&T의 통신망에서 연결을 끊는 신호로 사용됐다. 이 소리를 내면 전화국의 시스템은 전화가 끊어졌다고 인식하고 요금 부과를 멈추지만 실제로는 전화가 연결돼 있기 때문에 공짜로 전화를 걸 수 있었던 것이다. 드래퍼는 시리얼의 이름을 본떠 '캡틴 크런치'란 별명을 얻었고 2600이란 숫자는 해커들의 상징이 됐다.

◆잡스와 워즈니악도 한때 '프리커'

에스콰이어 잡지의 기자였던 론 로젠바움은 1971년 '작은 블루 박스의 비밀'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인그레시아와 드래퍼 등의 활약을 자세히 소개했다. 이 기사는 이후 수많은 프리커들이 생겨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 가운데는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도 있었다. 1971년 어느 가을날 이 기사를 우연히 읽은 워즈니악이 당시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던 잡스에게 이야기를 해줬다. 둘은 곧장 신호 생성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부품을 구입했고 머지않아 공짜로 전화를 걸 수 있는 장치를 완성했다. 워즈니악은 이 기계를 갖고 헨리 키신저 흉내를 내며 바티칸에 전화해 교황을 바꿔 달라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이들에게 영감을 줬던 '캡틴 크런치' 존 드래퍼는 훗날 애플에 입사해 '이지라이터'란 이름의 워드프로세서를 만들기도 했다.

남의 통신망에 불법으로 접속해 금전적 이득을 얻었다는 점에서 분명 프리킹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이다. 그래도 40여년이 지난 지금 저들의 행위가 언뜻 귀엽게(?) 보이는 까닭은 해킹으로 인한 위험이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 전반에 컴퓨터 사용이 늘어나면서 공짜로 전화를 훔쳐 쓰는 정도에 그쳤던 해킹이 점차 큰 힘을 발휘하게 됐다. 스턱스넷과 같은 악성코드는 원자력발전소 시스템의 오작동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몇 년 동안 해킹으로 인해 개인정보 유출,주요 웹사이트 마비 등 다양한 사건을 겪었다. 전 세계 국가들은 사이버 공간을 제4의 영토로 정하고 방비태세에 나선다고 아우성이다. 나날이 들려오는 해커들의 활약상을 보고 있노라면 전화기에 대고 휘파람을 불던 그때 그 시절을 낭만적이었다고 할 수밖에.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