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로 유명하다. 열하는 중국 북경에서 북쪽으로 210㎞ 떨어진 승덕(勝德)의 옛 이름이다.

1780년에 이곳에서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잔치가 열렸고, 박지원은 이 생일을 축하하는 조선사절단 정사 박명원의 개인 수행원으로 따라갔다. 의주에서 북경을 거쳐 열하까지 40여일간의 여행기가 곧 《열하일기》다.

명나라에 다녀올 때는 천자를 뵙고 온 기록이란 뜻으로 조천록(朝天錄)이란 이름을 많이 썼다. 청으로 바뀐 뒤는 오랑캐 멸시 의식에 복수의식까지 겹쳐 연경(燕京, 북경)을 다녀온 기록이란 뜻으로 연행록(燕行錄)이라 이름했다. 박지원의 사행은 도착지가 연경이 아니라 열하(熱河)였기 때문에 이름이 달랐다. 열하를 다녀온 조선 사신은 그가 처음이었고, 뒤로는 손자 박규수가 철종 말년에 다녀온 것뿐이다.

《열하일기》는 기술 형식에서도 이전의 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이전에는 메모에 불과한 것들이 많았다. 산천을 읊조린 시가 붙어 있어 개별 저술 구실을 겨우 했다. 박지원의 친구 홍대용의 《연기(燕記)》에 와서 비로소 저자의 생각이 들어가는 변환이 일어났는데 뒤이은《열하일기》는 한걸음 더 나아가 완전 탈바꿈을 시도했다. 역사 유적에 대한 코멘트, 사람들의 관습, 행사, 풍물 등을 다양한 글쓰기 형식으로 생동감있게 전달한다. 심지어 만난 사람, 함께 간 사람들 사이에 오간 우스개까지 대화체를 구사하여 생생하게 담았다.


《열하일기》의 초반부는 압록강을 건너 북경까지 가는 동안에 본 것들을 적었다. 고구려 유적지를 만나면 사실과 감상을 적고 중국인들의 벽돌 사용과 효율적 난방 시스템, 수레로 짐 나르기 등에 찬사를 보낸다. 국사 교과서는 이 대목을 북학파의 이용후생으로 가르친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가 더 역점을 둔 것은 북경에서 열하로 가서 거기서 벌어진 일들에 관한 기술 부분이다. 조선사신단은 건륭제의 생일잔치가 연경에서 열리는 줄 알았는데 도착해 보니 장소가 열하의 궁전 '피서산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5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길은 500여리다. 그의 유명한 ?

일야구도하(一夜九渡河)??란 글이 있듯이 하룻밤에 아홉번 강을 건너는 진기한 경험도 가졌다. 일행은 가까스로 잔칫날에 닿았다. 박지원은 수행원에 불과했지만 정사의 배려로 조선사신단이 건륭제를 알현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박지원을 놀라게 한 것은 하늘 아래 가장 존귀한 건륭제가 라마 불교의 지도자 판첸라마를 평등례로 대하는 장면이었다. 뿐더러 조선 정사를 보고 판첸라마를 정식으로 만나라고 한다. 정사는 우리는 청국의 황제와 관원만을 만나러 왔을 뿐이라고 회피하였지만, 황제는 판첸라마는 나와 형제나 다름 없으니 청국인과 마찬가지라고 답한다. 이 놀라운 광경에 박지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얼른 출입구 쪽으로 나와 수행 군관더러 빨리 술 한 병 사오라고 소리친다. 그의 머릿속은 미지의 세계 티베트로 달리고 있었다. 친구 홍대용이 한성판윤하기보다는 구라파 유학을 하겠다고 한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청국은 중국을 차지한 뒤에도 서쪽의 몽고족 준가르부의 도전을 계속 받았다. 몽고인들은 16세기 이래 대부분 라마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준가르부의 지도자들은 청을 압박하기 위해 티베트의 라마교 지도자들과 제휴를 꾀했다. 강희제가 이를 깨트리고자 원정 사업을 벌이면서 라마교의 지도자 달라이라마를 북경으로 초청하였다. 라마교는 달라이,판첸 두 지도직을 두고 성인인 자가 대표자가 되었는데 건륭제 때는 판첸라마 차례였다. 건륭제는 판첸라마를 위해 피서산장 곁에 황금 지붕의 행궁을 짓고 생일에 초대했다. 박지원은 건륭제가 대청제국의 안전을 위해 불교 승려를 평등례로 대접하는 광경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바깥의 신천지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요동을 가로 지를 때 요양의 백탑 앞에서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요동 벌을 보고 '아기가 어미의 자궁에서 나올 때처럼 사나이가 울음을 터뜨릴 만한 곳'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를테면 국제화를 처음 외친 선각자였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뜻밖에도 군주 정조대왕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그가 구사한 문체가 너무 속되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밝은 달이 수많은 하천에 하나씩 담기는 것에 비유할 정도로 진보적인 군주였다. 그는 태극이 나뉘어 도달한 괘의 수 1640여만을 두고 나의 백성의 수라고 하였다. 두 비유는 곧 태극인 군주가 나뉘어 백성이 된다는 군주 분신론의 백성관, 즉 군민일체론이었다. 이런 신사상은 오히려 박지원의 신세계와 짝하는 근대 지향의 생각이다. 그런데도 왜 그는 박지원의 신세계에 제동을 걸었을까.

군주는 속없는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이를 빙자하여 글공부와 글쓰기를 제멋대로 하여 자신이 겨우 잡아놓은 소민(小民) 보호 군주정의 틀을 깨트릴 것을 우려했던 것 같다. 최근에 공개돼 화제가 된 정조의 편지 내용으로 보면 그가 이런 원려로 속도 조절을 시도했을 공산은 얼마든지 상정된다. 정조는 제동을 건 직후 한 측근에게 곧 시행할 농서(農書) 정리의 대프로젝트는 박지원에게 맡겨야겠다고 말했다. 박지원도 바른 문체로 쓴 글을 새로 올리라는 군주의 지시를 웃음으로 맞았고, 군주도 그 숙제를 더 닦달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대립적 존재가 아니라 18세기 말 조선의 지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하나씩 세운 시대의 쌍벽이었다. 이들의 신사상은 세도정치의 어둠을 거쳐 개화기 군주 고종에 의해 '구본신참(舊本新參)'의 한덩이로 뭉쳐지기가 시도되었다. 시대를 고민한 진정한 신사상은 결코 죽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