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민이 서울 한강변에서 건너편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한 시민이 서울 한강변에서 건너편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과속 입법’에 임대차시장이 감정의 전쟁터가 돼버린 요즘입니다. 그런데 세입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순간은 언제일까요. 살던 집에서 더 이상 못 살게 되는 때일까요. 아니면 임대료가 갑자기 너무 많이 오르는 순간일까요. 모두 아닙니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죠.

부동산 담당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이런 사건을 제법 여럿 취재해봤습니다. 집값이 전셋값 밑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보증금을 온전히 돌려받을 수 없는 ‘깡통전세’가 돼버렸거나, 수백채를 갖고 있던 집주인이 갑자기 파산하거나, 잠적하거나. 모두 세입자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된 사건들이죠.

개중엔 아직도 마음의 짐으로 남는 일이 있습니다. 경기 화성 동탄신도시의 갭투자자였던 집주인이 세입자들에게 집을 무더기로 떠넘긴 고의경매 사건입니다. 경매는 돈을 빌려준 채권자가 돈을 갚지 못한 채무인의 부동산을 강제로 매각하는 절차죠. 그런데 이 사건의 채권자는 모두 채무인의 가족입니다. 집주인의 엄마아빠, 그리고 장모, 처형이 짠듯이 일순간에 빚을 갚으라며 경매를 넣는다니, 어딘가 이상하죠?

이 갭투자자는 곧 경매가 시작된다며 공포심을 일으킨 뒤 세입자들에게 웃돈을 받고 집을 넘겼습니다. 돈을 내지 않은 세입자들이 살던 집은 경매가 진행됐죠. 이때 세입자들의 선택지는 이렇습니다. 운 좋게 낙찰자가 생기면 보증금을 돌려받고 나가지만 아무도 응찰하지 않을 경우엔 돈 없다고 버티는 집주인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죠. 이렇게 경매가 유찰되다 보면 결국 지친 세입자들이 자신의 보증금으로 상계해 낙찰을 받습니다. 돈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바로 이게 고의경매 수법입니다.

이 사건은 지난 2년 동안 집코노미를 통해 수차례 전해드렸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면 머릿기사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죠. 그럼 뭐가 바뀌었을까요.

결국 검찰 수사까지 이뤄졌습니다만 재판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세입자들이 결국 집을 갖게 됐기 때문에 재산상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고, 집주인이 정말 보증금을 편취하려는 목적이었는지 증명할 수 없다는 게 검찰의 결론이었기 때문이죠.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내집마련을 했다가 이사를 앞두고 집을 떠안게 되면서 순식간에 2주택자가 된 세입자도 있었는데 말이죠. 몸이 불편하거나 생계가 어려운 분들도 많았지만 아무도 구제받지 못했습니다. 이게 법입니다.

징벌적인 제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필요합니다. 흔한 동네 건물주나 주인아저씨가 아니라 악성 임대인들에 대해서 말이죠. 아예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끔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 사건을 보도하는 동안 많은 전문가들의 입을 빌려 임대인과 임차인 간 정보의 비대칭성을 완화하고 보증보험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제안해왔지만 바뀐 건 없습니다. 다세대·다가구주택 등의 임대사업자에 대해선 보증보험 가입 의무가 생겼다지만 이 같은 형태는 임대인과 임차인을 적으로 만들고, 결국 비용 전가의 부작용만 낳을 뿐이죠. 이런 제도의 존재 자체를 아예 모르는 세입자들도 많고요. 공공이 비용을 보조하거나 혜택을 주며 의무화하는 방식으로 누구도 손해보지 않는 구도를 짰어야 합니다.

‘임대차 3법’ 시행으로 앞으론 더 많은 악성 임대인이 나타날 우려가 커졌습니다. 고의경매 못지않은 편법을 동원할 이들 말이죠. 정부가 전·월세상한제와 계약갱신청구권 도입을 자화자찬하는 동안 수많은 세입자들은 여전히 법으로 구제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몰리고 있습니다. 임차인의 주거안정성을 강화했다는 정부를 얼마나 야속하게 여길지 그 심정을 가늠할 수도 없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법은 여전히 생각보다 멀리 있습니다. 세입자들이 내집마련을 위해 모으던 피 같은 전세보증금이 날아갈 때도 주거안정 달성이란 이야기가 오르내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전형진 기자 withmol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