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을 직접 불러 “미국의 ‘반(反)화웨이’ 전선에 동참하면 심각한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관련 기업들에 비상이 걸렸다.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중 두 나라가 모두 자기 편에 서라고 노골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어느 편에 설 수도 없는 ‘샌드위치’ 상황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전체 매출의 18%와 39%를 중국에서 올렸다. 화웨이를 상대로 한 매출만도 각기 5조원에 달했다. 미국 편에 서면 제2의 ‘사드 보복’이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중국 편에 서면 미국은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나 퀄컴의 통신용 반도체 공급을 중단할 수도 있다.

이번 사태가 미·중 간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두 나라 간 분쟁이 한국 기업에 피해를 미친다면 이는 명백한 외교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청와대와 외교부가 “기업 간 의사결정에 정부가 일일이 개입할 수는 없다”며 방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기업 간 분쟁이 아니라 외국 정부 간 분쟁이라 한국 기업이 일방적인 희생양이 될지 모를 상황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자국 기업 보호를 외면하고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라”는 것은 명백한 직무 유기다. 주중 한국대사관이 중국 당국의 한국 기업 호출 사실을 외신을 보고 알았다고 한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실망스럽다.

한국 정부가 미·중 어느 편에도 서기 곤란한 처지임을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한쪽 편에 서지 않으면서도 한국 기업에 불똥이 튀지 않도록 외교력을 발휘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가능한 채널을 총동원, 미·중 양국 정부 관계자와 다각적 접촉부터 벌여야 한다. 기업들에도 대응 가이드라인 정도는 제시해야 한다. 지금까지 정부가 한 것이라고는 외교부 내 ‘미·중 전담태스크포스’ 신설 방침을 밝힌 것뿐이다.

정부가 지금처럼 눈치만 보며 대응을 미루다가는 또 다른 ‘사드 사태’로 번질 수도 있다. 몇몇 기업의 피해에 국한될 일이 아니다. 반도체산업 비중을 감안하면 우리 경제 전체에 엄청난 충격이 올 수도 있다. 현 정부의 외교는 ‘참사’ 수준이라는 비판을 적잖게 들어왔다. 정부는 이런 오명도 씻고 기업들의 피해 최소화를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대한민국 외교의 존재감을 보여줄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