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숙소로 거론되는 베트남 하노이 JW메리어트호텔 인근 식당에 미국 성조기와 북한 인공기가 걸려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숙소로 거론되는 베트남 하노이 JW메리어트호텔 인근 식당에 미국 성조기와 북한 인공기가 걸려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 대북 제재와 관련, ‘완화(relief)’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다. 작년까지 늘 강조한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을 코앞에 두고 나온 말이다. 10년 이상 유지돼 온 북핵 양대 원칙이 무너지면서 하노이 회담 역시 ‘말의 성찬’으로 끝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제재 유지, 완전한 비핵화’ 원칙 끝?

20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오는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2차 미·북 정상회담에 대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이틀간 만날 것”이라며 “많은 것을 성취할 것이고,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 될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추가 정상회담이 있을 것임을 시사한 발언이다. 전날 “핵실험이 없는 한 서두를 것이 없다”는 언급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북한의 단계적 핵협상을 수용한 데 이어 정상회담도 ‘쪼개기 핵담판’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어서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미국 내 반(反)트럼프 진영에선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의 ‘살라미 전술’을 받아들인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고 있다.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지난달 말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동시적·병행적’ 협상 전략을 밝힌 바 있다.

‘행동 대 행동’으로도 불리는 살라미 전술은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이후 북한이 줄곧 구사해 온 협상 방법이다. 목표를 잘게 쪼갠 뒤 ‘조각’들에 대한 상응조치를 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최종 목적 달성을 위해 시간을 버는 방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 완화를 언급한 것만 해도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대북) 제재를 해제하지 않았다”면서도 “그렇게 하고(제재를 풀고) 싶지만 반대편(북한)에서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13일 “제재 완화로 최대한의 결과를 얻으려 한다”고 한 발언의 연장선상이다. 지금까지 트럼프 행정부에서 제재 완화가 비핵화 상응조치로 언급된 적은 한 차례도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변화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CVID 없이 '제재 완화' 불쑥 꺼낸 트럼프…'쪼개기 핵담판' 수용하나
북한 요구대로 끌려가는 핵협상

트럼프 정부의 북핵 협상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전문가들은 협상의 전제부터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북한의 협상전략에 밝은 외교 소식통은 “북한은 점진적·단계적 핵협상 방식을 관철함으로써 이미 승리를 거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북한이 공식으로 서명한 문서가 아니라 김정은의 말에만 의존해 협상을 끌고 가는 것이 패착”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 초 정의용 청와대 외교안보실장을 단장으로 방북한 대북특사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특사단은 “김정은 위원장이 완전한 비핵화 의사를 밝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북한 관영매체가 밝힌 비핵화엔 조건이 달려 있었다. ‘북한에 대한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정이 보장되면’이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전제가 실현돼야 비핵화를 하겠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올초 신년사에서 핵실험·사용·확산 금지 의사를 밝히며, 조건으로 한반도 내 전략자산 반입 금지 등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 철거를 내걸었다.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의 이 같은 인식이 미국에도 번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김정은의 친서 몇 통으로 비핵화 의지를 확신하고 있다는 얘기다. 폼페이오 장관은 올초 언론 인터뷰에서 “김정은이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얼굴을 보고 분명히 북핵을 없애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비건 대표 역시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작년 10월 폼페이오 장관이 평양에서 김정은을 만났을 때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도 폐기할 것을 약속했다”고 전했다.

회담 시작 전부터 불거진 회의론

트럼프 대통령의 ‘기대치 낮추기’ 발언이 연일 이어지면서 하노이 담판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고 있다. 비건 대표는 지난달 스톡홀름과 평양에서 이뤄진 북한과의 실무협상에 대해 “협상이 아니라 서로 원하는 것을 모두 꺼내놓은 자리였다”고 말한 바 있다. 정상회담이 채 1주일도 안 남은 상황에서 21일 시작된 의제 협상이 비관론자들을 잠재울 만한 성과를 내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21일 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일부러 기대치를 낮추려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비핵화가 TV 코드 뽑듯이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며 “제법 긴 시간(에 걸쳐), 단계별로 후속 회담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 외교 소식통은 “하노이 회담의 성패는 지난번 싱가포르 회담 때와 달리 구체적인 후속 협상의 메커니즘을 합의문에 담을 수 있느냐에 있다”고 했다. ‘올해 말까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로드맵을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실무협상을 할 것’임을 협상 주체를 명확히 해 합의문에 담아야 한다는 얘기다. 영변 핵시설과 관련해서도 동결부터 검증, 해체까지 ‘원샷’ 해체를 받아내야지, 과정을 잘게 쪼개 금강산관광 재개 등과 맞교환하는 방식은 최악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