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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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브드 TV 개발은 오늘부로 중단하겠습니다.”

2015년 초 LG전자 월간 전략회의. 권봉석 LG전자 HE사업본부장(부사장·현 사장)이 ‘툭’ 던진 한마디에 회의실은 정적에 잠겼다. 상품기획, 연구개발(R&D), 마케팅, 영업, 생산부서 그룹장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커브드 TV는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패널 좌우를 구부려 화면 중앙이 움푹 들어가게 제작한 TV다. 2년 전 차세대 TV로 야심차게 출시한 제품 판매가 막 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취임한 지 몇 달 안 된 신임 사업본부장이 그동안 들인 투자금과 수고를 그대로 매몰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마케팅과 영업부서에선 연일 항의가 쏟아졌다. “삼성전자는 커브드 TV 모델 수를 오히려 늘리고 있다. 다양한 TV 모델이 있어야 다양한 소비자 수요를 맞출 수 있다.” 권 사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커브드 TV 대신 다른 제품을 제대로 만들어줄 테니 잘 팔아주세요.”

커브드 TV는 TV 시장의 주력 제품이 될 수 없다는 게 권 사장이 내린 결론이었다. TV는 거실에서 가족이 함께 보는 제품이기 때문에 한 명의 시청자에게 초점을 맞춘 커브드 TV는 많은 수요를 끌어내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현재 커브드 TV는 중국 등 일부 시장에서만 팔리는 니치(틈새) 상품으로 위상이 쪼그라들었다.

TV와 휴대폰사업부 이례적 겸직

지난해 말 발표된 LG그룹 사장단 인사의 ‘백미’는 승진과 교체 인사가 아니라 ‘겸직’ 인사였다. TV사업을 총괄하는 권 사장이 수년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휴대폰사업부(MC사업본부장)까지 맡게 된 것이 최대 화제였다. 생활가전과 TV, 휴대폰 등 LG전자의 3대 주력 사업 중 2개 사업부를 한 사람에게 맡긴, 전례 없는 인사였다. 그룹 안팎에선 ‘LG에 스타 최고경영자(CEO)가 나왔다’ ‘전도유망한 경영자를 사지로 내몰았다’ 등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LG전자 CEO인 조성진 부회장은 “(권 사장은) 어느 날 갑자기 된 게 아니라 오랜 기간 준비된 경영자”라며 무한 신뢰를 보냈다.

권 사장은 32년간의 ‘LG맨’ 생활 중 딱 2년(2012~2013년)만 MC사업본부에서 일했다. 휴대폰의 최종 디자인과 성능을 결정하는 상품기획그룹장(전무)으로 근무했다. 사업본부장에 이은 ‘넘버 2’ 자리였다. 당시만 해도 LG전자 MC사업본부는 초콜릿폰, 프라다폰의 성공 신화에 여전히 젖어 있었다. 회사 내부엔 “제대로 된 ‘대박 모델’ 하나만 터지면 애플, 삼성을 금방 쫓아갈 수 있다”는 기대가 남아 있었다.

권 사장은 달랐다. 그는 “LG엔 홈런이 아니라 연속안타가 필요하다”며 기본기에 충실한 제품 개발을 강조했다. 소비자의 신뢰를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당시 권 사장 주도로 LG전자가 출시한 전략스마트폰 G2와 G3는 세계적으로 각각 700만 대, 1000만 대 이상 팔리며 LG전자 스마트폰사업의 부활을 알렸다. 하지만 권 사장이 2013년 말 (주)LG 시너지팀장(전무)으로 옮긴 뒤부터 LG전자 스마트폰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올레드 매직’ 비결은 미래를 보는 안목

회사 동료들은 권 사장의 강점을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과 전략적 사고’라고 입을 모은다. 경쟁사 경영진도 권 사장의 혜안에 혀를 내두른다. 권 사장이 MC상품기획그룹장 시절 주목한 기술은 디스플레이와 카메라 단 두 가지였다. 고객에게 차별화한 제품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이라고 판단했다. 핵심 역량과 자원을 이 분야에 집중했다. G2에선 5.2인치 대화면을 처음 도입해 당시 4인치 모델 위주의 애플보다 경쟁 우위에 섰다. G3도 풀HD보다 화질이 두 배 개선된 QHD 디스플레이와 이미지 흔들림 보정 카메라 기술을 선보여 ‘히트 상품’ 반열에 올랐다.

“업의 본질에 집중하라”는 얘기도 자주 한다. 권 사장은 TV의 본질이 ‘화질과 공간’에 있다고 판단한다. 경쟁회사가 LCD(액정표시장치) 기반의 TV 기술을 발전시킬 때 권 사장이 올레드TV 혁신에 집중한 이유다. LCD TV보다 화질이 뛰어난 데다 모양을 쉽게 변형할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판단했다. ‘내구성이 약하다’는 OLED 소재의 약점은 기술 혁신으로 보완했다.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판매량이 가파르게 늘었다. 권 사장이 HE사업본부를 맡기 직전인 2014년 LG전자의 OLED TV 판매량은 7만8000대에 불과했다. 지난해 말 판매량은 160만대 안팎으로 4년 만에 20배 이상 증가했다.

경영전략 제1원칙은 ‘선택과 집중’

권 사장이 경영 전략을 짤 때 가장 우선하는 기준은 ‘선택과 집중’이다. 한정된 인적·물적 자원을 성과를 낼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다. 권 사장과 함께 일해본 직원들은 “버려야 할 것과 집중해야 할 것을 귀신같이 찾아낸다”고 평했다.

5%를 넘으면 ‘초우량’으로 평가받는 TV사업의 영업이익률이 10% 안팎까지 치솟은 것도 이런 선택과 집중 전략 때문이다. 권 사장이 HE사업본부를 맡은 2014년 말 무렵 TV업체들은 경쟁적으로 모델 수와 디자인을 늘렸다. 다양한 소비자의 기호를 맞춰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권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잘되는 식당의 메뉴는 한두 가지다. 김치찌개부터 돈가스까지 수십 가지 메뉴를 파는 식당은 품질이 떨어지고 재고가 쌓여 다시 제품 맛이 떨어지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권 사장은 치밀한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생산 제품 수를 줄이고 여기에 마케팅을 집중했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중저가 모델은 과감하게 정리했다. 이를 통해 R&D 비용을 줄이고 납품 원가를 떨어뜨렸다. 2015년 573억원에 불과했던 HE사업본부 영업이익은 △2016년 1조2374억원 △2017년 1조3365억원 △2018년 1조5185억원 등으로 급증했다. 영업이익률은 2015년 0.3%에서 2018년 9.4%로 수직상승했다.

■권봉석 사장 프로필

△1963년 부산 출생
△1987년 서울대 산업공학과 졸업
△1987년 금성사(현 LG전자) 가전부문 신사업기획실 입사
△2008년 LG전자 모니터사업부장(상무)
△2010년 LG전자 HE미디어사업부장(상무)
△2012년 LG전자 MC상품기획그룹장(전무)
△2013년 (주)LG 시너지팀장(전무)
△2015년 LG전자 HE사업본부장(부사장)
△2018년 LG전자 HE사업본부장(사장)
△2019년 LG전자 MC·HE사업본부장(사장)
권봉석 LG전자 사장 "홈런 대신 연속안타 쳐라"…첫째도, 둘째도 '기본' 강조
■여의도보다 마곡 더 찾는 권 사장…LG 스마트폰 부활에 '집중'

직함에 스마트폰을 TV보다 먼저 적어
직원들 "턴어라운드 결기 느껴진다"

불필요한 지시 없는 합리적 리더십 평가
'후배들이 가장 같이 일하고픈 상사' 꼽혀


권봉석 LG전자 MC·HE사업본부장(사장·사진)은 LG그룹 계열사 경영진 중 ‘후배들이 가장 같이 일하고 싶어하는 상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수평적이고 합리적인 리더십에 두뇌 회전이 빨라 불필요한 업무 지시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본인이 챙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보고도 제대로 받지 않고 권한을 위임한다.

토론과 회의를 즐기는 것도 권 사장의 특징이다. 내부 회의를 할 때면 각 부서장 의견을 경청한 뒤 본인 의견을 제시한다. 본인 결정에 이의를 제기해도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면 곧바로 수용한다. 불필요한 일을 하는 임직원은 극히 싫어한다. 기본적으로 챙겨야 할 업무를 빠뜨렸을 때도 목소리에 냉기가 감돈다. 직원들은 “조목조목 따지는 데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고 얘기한다. 때때로 ‘너무 냉정하다’는 오해를 받는 이유다.

6시가 되면 ‘칼퇴근’을 한다. 임원 승진 후 업무 시간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게 되면서 들인 습관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 층에서 나보다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없다”는 자랑도 한다. 대신 출근시간이 빠르다. 오전 6시30분을 넘기지 않는다. 전략적 사고에 능한 이유를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 생활 습관 때문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런 권 사장이 최근 무섭게 집중하는 사업이 있다. 작년 말부터 새로 맡은 스마트폰사업(MC사업본부)이다. TV사업부서인 HE사업본부에선 “권 사장의 얼굴도 보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온다. HE사업본부가 있는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빌딩보다 MC사업본부가 있는 마곡 LG사이언스파크를 더 자주 찾는다. 공식 직함인 MC·HE사업본부장도 본인이 결정했다고 한다. 4년 연속 대규모 적자를 내고 있는 MC사업본부 명칭을 지난해 1조5000억원대 영업이익을 거둔 HE사업본부보다 앞에 뒀다. LG전자 관계자는 “휴대폰사업을 턴어라운드하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고 했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