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시끌한 관광지는 잊어라…시간도 쉬어가는 '로마 속의 로마'
‘로마(ROME)’. 헤아려지지도 않는 역사의 웅장함을 떠안은 콜로세움 앞에 작은 티끌이 된 듯 압도되는 곳. 스페인광장 앞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 영화 속 여주인공이 되어 보는 곳. 이렇듯 로마는 세상에 둘도 없을 위대한 도시이자 완벽한 여행지다. 그러나 문득 이 장엄하고 위대한 역사를 품은 도시의 현재 모습이 궁금해졌다. 관광객의 바쁜 발걸음이 아니라 로마에 사는 사람들의 진득한 발자국이 새겨지고 또 지워지는 ‘오늘의 로마’ 말이다. 오늘날 로마인들의 삶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짐작 하나, 기대 하나로 카메라 하나를 들고 길을 나선다. 지도를 반으로 나누어 흐르는 강 왼편 아래쪽. 낯선 이름의 마을 ‘트레스테베레(Trastevere)’다.

트레스테베레(이탈리아)=글·사진 이은비 부사무장 eblee135h@flyasiana.com

트레스테베레에서 만나는 역사의 숨결

로마 시내와 트레스테베레의 경계인 테베레 강.
로마 시내와 트레스테베레의 경계인 테베레 강.
쌀쌀한 바람도 기분 좋게 느껴질 만큼, 딱 적당한 햇빛이 강물 위로 반짝이며 떨어진다. 여행에 있어 또 다른 동행인이라 해도 될 만큼 그날의 여행을 좌우하는 게 날씨인지라, 그런 점에서 꽤 좋은 동행인을 만난 셈이었다. 시작이 좋다.

트레스테베레는 ‘테베레(tevere)강 건너’라는 뜻이다. 이곳은 과거 상류층부터 서민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하던 가장 오래된 거주지로 강 하나 건너 펼쳐진 역사와 문화의 웅장함을 품은 로마와는 또 다른 오늘의 이야기가 숨쉬는 곳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로마인의 후손이라 믿고 있다고 하니 이곳은 분명 2018년의 로마의 삶을 축소시켜 놓은 곳일 것이다. 길을 잃어도 좋을 매력적인 골목길에 오늘의 삶이 배어든 곳. ‘트레스테베레’에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소박한 듯 아기자기하고 세월에 빛바랜 건물들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평범한 월요일 아침, 골목의 식당 주인은 작은 칠판에 손으로 삐뚤게 쓴 스페셜 메뉴판을 어디에 놓을지 고심하고 방금 일어난 듯한 모습의 할머니는 도톰한 머플러만 두른 채 익숙한 듯 동네 카페로 들어간다.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진다. 마치 한 명 한 명 모두가 소설 속 주인공처럼, 그 평범함이 특별해 보인다.

골목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
골목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
트레스테베레는 발길 닿는 대로 마음이 끌리는 대로 걷는 것도 좋지만 이곳의 심장부에 있는 광장 산타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광장에서 여행을 시작할 것을 추천한다. 이곳은 현지인뿐만 아니라 여행자들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북적인다.

지도와 성당 하나를 번갈아 가며 보더니 확신에 찬 눈으로 일행들에게 성당을 가리키는 한 여행자 덕에 나도 이곳 명소 중 하나인 ‘산타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in Trastevere)’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성당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중 하나로 4세기께(340년께) 건립 후 12세기(1120~114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됐다. 이곳은 성당 내외부의 아름다운 모자이크 장식과 마리아의 생애를 담은 모자이크화의 연작으로 유명하다. 성당 그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한 곳 없이 빼곡히 무언가를 의미하는 모자이크와 조각상들로 채워진 이 성당은 종교를 가지지 않은 누구라도 화려함과 엄숙함에 압도될 것이다. 꾸미지 않은 차림의 마을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들의 소박한 삶을 품고 있는 이 위대한 역사의 어우러짐에 왠지 모를 경이로움과 행복한 숙연함이 느껴진다.

성베드로가 처형당한 성당도

성당을 둘러보고 나오니 사람들이 광장 앞 분수대를 둘러싼 낮은 계단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익숙한 사이인 듯 손인사 두어 번으로 반가움을 표하고는 이내 계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 신사들과 12월의 햇살에 몸을 녹이는 마을 사람들 뒤로 분수의 나라답게 작은 분수 하나가 눈에 띈다. 이 팔각분수는 1472년 로마 지도에도 위치가 표시돼 있을 만큼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평범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굽이치는 물결의 조가비 장식 등 하나하나 섬세한 예술작품과도 같다.
 아기자기한 매력의 트레스테베레 골목. 작고 조용한 마을인 트레스테베레는 한때 다양한 계층의 로마시민이 모여 사는 주거지였다.
아기자기한 매력의 트레스테베레 골목. 작고 조용한 마을인 트레스테베레는 한때 다양한 계층의 로마시민이 모여 사는 주거지였다.
이 작은 분수는 몇백 년의 세월의 변화를 맞이하고 보내주었을 것이다. 자신을 배경 삼아 한숨 돌리고, 대화를 나누고, 엉덩이를 툴툴 털며 일어났을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도 말없이 들어주고 고스란히 안고 있으리라. 이 나이든 작은 분수가 문득 대견하게 느껴졌고 나 또한 엉덩이를 툴툴 털며 이 분수에 이야기를 하나 남기고 발걸음을 옮긴다.

사람 사는 마을이라 해도 수천 년 역사의 로마는 로마인지라 마을 안에서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Basilica di Santa Cecilia in Trastevere)’이나 성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아 성당(San Pietro in Montorio)’도 만나 볼 수 있다. 건축이나 미술 작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빌라 파르네시나(Villa Farnesina)’와 ‘코르시니 미술관’도 놓치지 말자.

커피 한 잔으로 그들의 삶에 녹아들다

몸을 녹일 겸 눈앞에 보이는 카페로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빛바랜 듯 오묘한 색의 벽지와 빼곡히 걸린 꽤 나이든 듯한 그림들, 그리고 열려있는 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반쯤 실내를 채운 어둑어둑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카페였다.
트레스테베레 카페에서는 여유가 넘치는 테베레 주민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트레스테베레 카페에서는 여유가 넘치는 테베레 주민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손에 꼭 쥐고 살던 휴대폰을 잠시 넣어두고 분위기를 담고자 여유를 부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할머니 손님과 주인아주머니의 웃음소리가 음악소리 대신 좁은 카페를 가득 메웠다. 한껏 멋을 낸 여자는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했다. 이탈리아 커피는 조그만 잔에 담아 마시는 에스프레소가 대표적인데 높은 압력으로 짧은 순간 추출하기 때문에 카페인 양이 적고 순수한 커피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건네받은 여자는 아기 주먹만 한 잔에 그보다 더 앙증맞은 티스푼으로 설탕을 한 스푼 덜어 넣는다. 에스프레소는 보통 한 잔을 두어 모금으로 나눠 마시는데 첫 모금은 짙은 스모키향을, 마지막 한 모금은 바닥에 녹은 설탕의 달콤한 풍미를 즐기기 위함이라 한다. 책에서 읽었던 이 한 구절이 눈앞에서 펼쳐지니 커피를 제대로 즐기는 그녀가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손님들의 이야기 소리, 커피잔을 들고 내리는 달그락 소리, 듣는 사람 없이 재잘대는 낡은 라디오 소리까지. 한시도 쓸쓸할 틈 없는 분위기에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녹아내린다.

사람들은 바(bar)를 사이에 두고 주인과 마주 보고 서서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눈다. 분명 처음 보는 사이인 듯한데 옆에 선 사람들과 어렵지 않게 말을 섞는 모습이 정겹다. 자리에 앉아 들고 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마치 바를 무대로 한 흥미로운 공연을 관람하는 것과 같았다. 문득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나와 일행뿐이라는 걸 느꼈다. ‘왜 다들 앉지 않을까?’라는 호기심에 주위를 둘러보던 중 작은 칠판에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가격표에 서서 마시는 가격이 적혀있다. 우리가 계산한 가격보다 반은 싼 그야말로 자릿세를 뺀 가격이다. 다 같이 ‘아~’라는 한발 늦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코페르토(coperto)’라고 하는 이탈리아 카페문화로 일종의 자릿세인데 그래서인지 선 채로 짧은 시간 가볍게 에스프레소 한 잔을 비우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던 로마인들의 모습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로마의 한켠 기억 속에 머무르다.

카페에서 나와 지도 없이 터벅터벅 걸어본다. 무심코 돌아본 어딘가의 골목길, 아기자기한 샛길, 거리 곳곳이 그 어떤 관광지보다 흥미롭다. 해를 마주한 벽면은 페인트가 바래서 희끗희끗해졌고, 반대편 그늘진 벽의 선명한 노란빛은 원래의 벽 색깔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누군가의 집 창문까지 타고 올라간 담쟁이 넝쿨이 갈 곳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트럭에 실려있는 눈사람 장식은 어디로 가게 될까. 크리스마스를 앞둔 한겨울의 트레스테베레를 거닐며 이 모든 것을 멀찌감치 서서 한눈에 담아 본다. 작은 골목의 연속인 트레스테베레의 풍경은 하나하나가 이야기를 품고 읽어주기만을 기다리는 소설책과도 같다.
빛바랜 건물이 늘어선 트레스테베레의 골목 풍경.
빛바랜 건물이 늘어선 트레스테베레의 골목 풍경.
어느덧, 오후가 되고 거리는 더욱 생기가 넘친다. 한 할아버지는 벽에 기대어 신문을 읽고 있었고 그 앞으로 말 안 듣는 강아지에게 이끌리듯 걸어가는 젊은 여자도 보인다. 순간 엄청난 피사체라도 발견한 듯 각도를 바꿔가며 셔터를 눌러댔다. 사실 특별할 것은 없었다.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사람 사는 풍경이었지만 유난히 그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많은 정보도 없는 이곳 트레스테베레를 선택한 것과 같은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멈춰진 역사의 그 웅장함과 신비로움에 매료된 관광객들이 로마 시내를 가득 채웠을 때도 작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이 작은 마을에서는 테베레 강물처럼 현재의 로마인들의 삶이 느릿느릿 흘러가고 있었다. 로마의 한켠, 트레스테베레. 기억 속에 남은 한 장 한 장의 장면이 지금도 아른거린다.

여행 메모

아시아나항공은 인천~로마(FCO)를 화·목·토·일 1주일에 네 편 운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