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의 차기 수장을 점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예외 없이 ‘기초소재 사업부문을 맡은 화학공학과 출신 LG맨’ 몫이었기 때문이다. 전체 매출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맏형’ 부문장에게 대권을 넘기는 건 인화(仁和)를 강조하는 LG에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故) 성재갑 회장, 노기호 사장, 김반석 부회장, 박진수 부회장이 이런 코스를 밟아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구광모 LG 회장은 이런 ‘암묵적인 잣대’가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 신학철 미국 3M 부회장을 차기 CEO로 뽑았다. 신 부회장은 주로 전자소재와 전략·사업개발 마케팅 등을 담당했고, 기계공학과(서울대)를 나왔으며, LG 배지는 달아본 적도 없다. ‘구 회장이 안정보다 변화를 선택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안정보다 변화 선택한 구광모…'뉴LG' 향한 파격인사 신호탄
인사 키워드는 ‘혁신’과 ‘글로벌’

재계에선 구 회장이 이번 인사를 통해 “LG의 미래는 ‘혁신’과 ‘글로벌’에 있다”는 메시지를 임직원에게 던진 것으로 해석했다. 신 부회장이 35년 동안 3M에 몸 담으면서 익힌 혁신마인드와 글로벌 운영 노하우를 LG에 심기 위한 인사였다는 분석이다. 이번 영입을 위해 구 회장이 신 부회장을 직접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1902년 설립된 3M은 세계 200여 개국에 9만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전통의 대기업’인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미국 컨설팅업체 부즈앤드컴퍼니 선정)으로 통한다. 신 부회장은 이런 3M에서 글로벌 연구개발(R&D)과 사업개발, 마케팅 등을 책임지며 ‘혁신 전도사’로 일했다.

LG가 신 부회장에게 주목한 또 다른 키워드는 ‘글로벌’이다. 신 부회장이 쌓은 글로벌 네트워크와 해외 사업운영 노하우를 높이 샀다는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3M은 포스트잇, 스카치테이프 등 소비재뿐만 아니라 자동차, 통신, 전자, 헬스케어 등 다양한 산업재도 생산한다”며 “6만 개에 달하는 3M 제품을 세계에 팔아본 경험과 생산관리·공급망 관리 노하우를 LG가 배우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LG화학은 160여 개국에서 에틸렌,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편광판 등 석유화학 및 정보전자소재부터 전기차 배터리, 성장호르몬까지 3M 못지않은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석유화학업체였던 LG화학의 사업 포트폴리오가 신소재, 배터리, 정보전자소재, 생명과학 등 첨단 소재·부품 및 바이오 분야로 확대된 것도 LG가 새로운 리더십을 찾은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석유화학 및 기초소재 사업은 기술 변화가 상대적으로 더딘 만큼 ‘안정적인 관리’가 CEO의 첫 번째 덕목이었지만 이제는 트렌드를 미리 읽고 움직이는 ‘발 빠른 변화’가 중요해지고 있어서다. 재계 관계자는 “LG전자가 올초 오스트리아의 자동차 조명업체 ZKW를 인수한 데 이어 LG화학도 해외기업 인수합병(M&A)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해외기업 M&A 대상을 고를 때 신 부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 부회장은 내년 1월부터 LG화학으로 출근하고, 3월 열리는 주주총회 및 이사회 의결을 거쳐 정식 취임한다.

CEO 교체폭에 관심

재계 관심은 이달 말로 예정된 LG그룹의 정기 임원인사에 쏠리고 있다. 구 회장의 파격인사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서다. 관전 포인트는 이번에 물러나는 박진수 LG화학 부회장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의 부회장(권영수 (주)LG, 조성진 LG전자, 차석용 LG생활건강, 한상범 LG디스플레이, 하현회 LG유플러스)의 교체 폭이다. 일각에서는 박 부회장에 이어 추가로 ‘용퇴’를 선언하는 부회장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실적 측면에서 LG화학의 전성기를 이끈 박 부회장이 물러난 것처럼 경영능력과 무관하게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세대교체 인사’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번 인사로 LG화학 CEO 연령은 66세에서 61세로 소폭 낮아졌다.

신 부회장에 이어 주요 계열사 CEO, 최고재무책임자(CFO), 최고운영책임자(COO) 등 핵심 인력을 추가로 외부에서 수혈할지도 관심사다. 그동안 LG그룹이 외부에서 영입한 CEO는 P&G 출신인 차석용 부회장과 KT 출신의 이상철 전 LG유플러스 부회장 정도였지만, 재계에선 추가 영입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임원 인사폭은 상당히 클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이 많다. 23년 만에 그룹 총수가 바뀐 만큼 분위기 쇄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다. 고 구본무 선대회장도 취임 첫해인 1995년 사상 최대 규모인 354명의 승진 인사를 했다.

오상헌/고재연 기자 ohyeah@hankyung.com